카테고리: 편향왜곡방송

이제 언론들도 광화문 집회 관심 보도… 왜곡 축소 어용 언론 점차 설자리 없어

보수진영, 서초동 촛불집회에 맞불..광화문 총집결해 “조국파면” 

한국당 “300만”·투쟁본부 “200만”..’박근혜 탄핵집회 이후 최대 인파’ 분석도
광화문 광장∼서울역 2.1km 구간 차량 전면 통제..인파로 가득 메워 황교안 “曺 지키려 국정파탄”..나경원 “단군이래 최악 정권”홍준표 ‘文대통령 국민탄핵 결정문’ 낭독도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박의래 이은정 이동환 기자 =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파면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천절인 3일 오후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정당,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같은 시간 각각 집회를 개최했으나, 광화문 앞에서부터 서울시청을 지나 서울역까지 왕복 10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는 ‘조국 파면’에 한목소리를 냈다.  
한국당은 집회 참석 인원을 300만명 이상으로,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투쟁본부)는 200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광화문 집회 이후 최대 인파가 몰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날 집회는 지난달 28일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주변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자극을 받은 보수 진영이 총결집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주말인 오는 5일 서초동에서 2차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열릴 것으로 예상돼 ‘검찰개혁’ 대 ‘조국 파면’ 양 진영 간 대결은 더욱 확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https://news.v.daum.net/v/20191003164542045 

“문재인·조국 끌어내리자” 범보수 총결집…”우린 500만” 

인파 몰리며 광화문역 열차 지연·휴대폰 인터넷 불통도”청와대로 행진할 것…’대통령 하야의 날’로 삼겠다” 

(서울=뉴스1) 유경선 기자,민선희 기자 = 개천절인 3일 문재인 정부와 조국 법무부장관을 규탄하는 범보수진영의 집회가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로 열렸다.  
당초 오전까지 제18호 태풍 ‘미탁'(MITAG)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겠다고 예보됐지만 일찌감치 비가 그치면서 대대적인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날 집회는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투쟁본부)와 자유한국당·우리공화당 등이 각각 주최했는데, 이들은 통합 300만명에서 500만명의 참가자가 운집했다고 주장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이날 정오가 되기 이전부터 광화문광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낮 12시 이후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는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일대가 참가자들로 가득 채워졌다.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역과 광화문 일대, 덕수궁 앞 등에서 산발적으로 집회가 열리던 것과 달리 이날은 서울역~남대문 일대부터 시청~광화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도로가 사람들로 덮였다. 
세종대로와 종로1가와 새문안로 등의 차량이 통제됐고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은 역사에 인파가 몰리면서 지하철 운행이 지연되기도 했다. 집회 장소 인근에서는 휴대폰 인터넷 연결이 끊기거나 사람들이 서로 밀고 밀리며 다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4229934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문재인·조국 퇴진’ 대규모 집회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천절인 3일 광화문과 시청광장 일대에서 열렸다. 
이날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등 시민단체와 자유한국당이 광화문 광장 일대에 운집한 가운데 오후 1시부터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규탄대회’가 시작됐다. 
경복궁 앞에서부터 시청광장을 지나 숭례문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세종대로 왕복 10개 차로에는 시민들이 모인 상황이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집회 현장 일대에서는 통신 장애 현상 까지 일어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날 국민과 당원을 포함해 총 300만명 이상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다. 당초 한국당 등 보수진영이 목표로 한 100~150만명 보다 2~3배 올려잡은 수치다.   행사에는 한국당, 우리공화당 등 보수정당을 비롯해 자유우파총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 등 시민·종교단체 등이 총집결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나경원 원내대표 등 한국당 지도부, 조원진·홍문종 우리공화당 공동대표,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 주요 보수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 장관 사퇴와 문재인 정권 퇴진을 외쳤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244996 

“태어나서 처음 집회, 분해서 나왔다” 광화문 채운 ‘조국 반대’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와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이들이 3일 서울 시내 광장에 총집결했다. ‘반(反) 조국’ 기치 아래다. 범보수세력이 주도한 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시민이 광화문광장, 서울광장, 숭례문 앞 등 세종대로 일대에 몰렸다.  이날 집회는 주최 세력에 따라 여러 곳에서 나뉘어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오전부터 세종대로 곳곳에 세력별로 집회 거점이 만들어졌다.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교보빌딩 앞, 오후 1시), 일파만파애국자연합(동화면세점 앞, 오후 2시), 한국교회기도연합(서울광장, 낮 12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대한문 앞, 낮 12시), 자유한국당(세종문화회관 앞, 오후 12시45분), 우리공화당과 천만인무죄석방본부(서울역광장, 오후 12시30분) 등이다. 
하지만 세력별 경계는 정오를 넘기면서 무의미해졌다. 오전 10~11시부터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집회 참가 인파가 정오 이후 급격히 몰리며 서울역부터 광화문까지 길이 2㎞, 폭 100m(왕복 10~12차로) 공간에 거대한 ‘인간 띠’가 만들어졌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문 정권 심판 조국 구속’ ‘문재인 퇴진’ 등의 피켓을 든 채 “조국을 파면. 문재인 정권 퇴진” 등을 외쳤다. 
보수 세력이 주도하는 집회에 이처럼 많이 인파가 몰린 건 전례가 없다. 그런 만큼 광장에는 “태어나서 집회란 걸 처음 나와봤다”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 봉천동에 사는 주부 유모(55)씨는 “집회를 한 번도 안 나왔는데 너무 분해서 나왔다”며 “아이가 고3이고 의대를 준비한다. 원래 가족들과 정치 얘기를 안 했는데 이번에 얘기하다 보니 뜻이 맞아서 가족들이 다 함께 나왔다”고 했다. 3살과 5살 된 딸들과 함께 현장을 찾은 주부 김모(35)씨는 “한 번도 집회에 나간 적이 없는데 현 정부가 거짓말로 거짓말을 덮은 게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나왔다”고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2942199 

8.15 수십만 광화문 인파, 단 한 줄 보도 없어

-광복74주년과 건국 71주년, 비 오는 날씨에도 광화문 일대 문재인 정권 규탄 인파 몰려
-KBS, 반일운동 집회 길게 보도. “정부 반대시민 3천여 명 집회” 보도. 수십만 명을 줄여
-방송은 집권여당 홍보매체로 전락. 유튜브 시청하는 국민들이 많아지자, 그것마저 통제

8.15의 수십만 광화문 인파,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지난 8월 15일 광복74주년과 건국 71주년을 맞아, 광화문 일대에는 문재인 정권을 규탄하는 인파들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비 오는 날씨에도 길거리는 빽빽이 들어찬 인파 때문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휩쓸려 움직일 정도였다.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을 규탄하기 위해 모인 성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지상파 방송들은 광화문 국민들의 궐기대회를 보도하지 않았다. MBC와 SBS 등 지상파는 저녁 8시 메인 뉴스에서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대신 반일운동을 촉구하는 집회는 중계차 등을 동원해서 보도했다.

대한민국의 대표 공영방송이라는 <KBS뉴스9>도 이날 광화문에서 벌어진 반일 운동 집회는 중계차를 동원해 길게 보도한 뒤, 그 뉴스 끝에 “현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 3천여 명이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면서 촛불 시민들과 대치하기도 했다”라고 덧붙였을 뿐이다. 수십만명의 인파를 3천명이라고 보도했다. 기가 찬다. 이 뉴스를 보도한 기자는 정녕 눈을 감고 있었나.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보수성향의 매체들도 광화문 집회를 소홀하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문재인 정권규탄대회’와 ‘반일 집회’ 사진을 나란히 보도했고, 중앙일보는 반일 집회 사진은 사이즈를 크게 실은 반면, 문 정권 비판 집회는 작은 크기의 사진으로 보도했다.

그야말로 광화문의 8.15행사 보도는 언론이 얼마나 왜곡, 편파, 조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서 수십 만 명이 모여 범국민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는데도 보도를 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남침을 해도 보도를 안 할 것인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일들 중 우리가 아는 것은 얼마나 될까? 언론이 얼마나 숨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8월 15일 방송들은 대부분 반일 감정을 선동하는 뉴스들로 가득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실성이 없고 말잔치에 불과한 경축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대신 일부 방송은 야당 대표가 식장에서 박수를 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뉴스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8월 14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기자회견 한 내용은, 당일 <KBS뉴스9뉴스>에 단 한 줄도 내지 않았다.

방송은 완전히 집권여당의 홍보매체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편파적인 방송 대신 유튜브를 시청하는 국민들이 많아지자, 그 유튜브마저 통제하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 모든 위기의 근원은 문재인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하는 언론에 있다고 본다.

언론이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어떤 독재, 압제를 하더라도 국민들은 속을 수밖에 없고, 또 선거를 하더라도 절대로 공정할 수 없다. 야당과 국민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언론, 특히 방송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 주시라.

jayooilbo@jayoo.co.kr
http://www.jayoo.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92

인권, 양성평등 관련 언론매체의 ‘왜곡과 편향보도 심각’

국내 유력 매체, 기독교의 동성애 반대를 혐오세력으로 폄하

인권조례나 양성평등 관련 국내 언론매체의 보도가 심각한 왜곡과 편향보도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강원도의 한 지역신문은 속초시의회가 제정을 주진중인 ‘시 인권보장조례’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를 ‘특정단체 회원들의 집단반대 의견에 논란을 빚고 있다’고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인권보장조례가 특정 단체가 주장하는 동성애 두둔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시의회 관계자의 말은 인용보도하면서도,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종교단체 관계자의 말은 한 마디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 전문방송 khtv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근거로 제정되고 있는 속초시인권조례가 인권위법의 역차별을 조장하는 독소조항인 종교(이단 포함), 임신 또는 출산(청소년 포함), 가족형태(동성결혼 포함),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종북 포함), 전과(前科), 성적지향(동성애), 병력(病歷)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조항들에 대한 구별, 비판을 일체 금지시키고 있어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 최근 제3회 부산퀴어문화축제가 부산 해운대구의 반대로 취소된 건에 관한 보도의 경우에도 ‘ㅎ’신문은 “문화축제 취소, 해운대구, 혐오세력 방관”이란 제목으로 퀴어축제를 반대하는 사람과 단체를 ‘혐오세력’으로 일컫는 퀴어행사측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 19일 소개했다.

또 ‘ㄱ’신문은 인권교육을 필수과정으로 지정한 연세대의 인권교육에 대해 “반동성애를 내건 보수.개신교 단체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고 기독교계의 반대를 공격 행위라는 관점으로 지난 1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에 대해 “사회적 성을 일컫는 ‘젠더’ 개념이 ‘동성애 옹호’로 이어지기 때문에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뒤흔들 수 있다는 혐오세력의 오랜 논리 역시 되풀이됐다”며 기독교계의 반대의견을 혐오세력의 논리라는 식으로 폄하 보도했다.

크리스천 퍼스펙티브

최근 한국 언론의 친동성애, 젠더 개념의 성평등이 당연한 추세이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혐오세력이나 집단’으로 규정하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언론은 객관적이며 이해 당사자 양측의 입장을 공정하게 보도해야한다는 기본적인 보도태도 조차 지키지 않는 왜곡, 편향보도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 언론의 좌편향되고 급진개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이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지 심각하게 깨닫고 보도할 수 있도록,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게 되도록 기도하자.

http://gnpnews.org/archives/50565

‘독립운동가 도시락’에 이승만…불매운동 조짐에 ‘난감’

GS25 “독립운동가, 보훈처 추천한 인물 중 선정…의도 없었다” 해명 진땀
업계 “평가 엇갈리는 인물인데 굳이…”소비자들 “잘못된 역사 인식 우려”

원본보기 GS25 편의점에 진열된 도시락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 뉴스1
(서울=뉴스1) 신건웅 기자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GS리테일이 야심차게 출시한 독립운동가 도시락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소개한 것이 발단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면서 소비자 반응도 둘로 나뉘었다. ‘공'(功)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과'(過)가 더 크다며 “불매하겠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GS리테일도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가 추천한 인물 가운데 고른 것인데 논란이 커지고 있어 난감해 하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GS리테일은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국민이 지킨 역사, 국민이 이끌 나라’라는 테마로 역사 알리기 사업에 나섰다.

편의점 GS25가 판매하는 도시락에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동영상을 제작해 캠페인을 벌인다. 또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배경음악(BGM)도 GS25와 슈퍼마켓, 랄라블라 등에서 틀기로 했다.

GS리테일이 독립운동가 알리기에 나선 것은 창업주인 허만정 선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소개로 창업주의 뜻을 이어가기로 한 것.

허만정 선생은 100여년 전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했고,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후원금을 보탰다. 또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 교육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진주여고를 설립하기도 했다.

논란은 소개하는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대통령이 선정되면서 시작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립운동과 광복 후 초기 한국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강대교를 폭파해 수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잃었고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한 연임에 대한 비판도 끊이질 않고 있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며 강경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일부 소비자들은 GS리테일이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선정한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GS25 도시락을 불매하겠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한 커뮤니티에는 댓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리로 탄핵되고 심지어 일본에 이어 미국에게 대리지배를 요청한 이승만”이라며 “해방 후 미군정의 힘으로 장기 집권한 독재자를 GS25는 무슨 의도로 이런 것을 만들어 파느냐”고 꼬집었다.

특히 공에 대한 부분만 있고 과에 대한 부분은 제외돼 있어 제대로 된 평가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간베스트’ 등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 스티커가 붙은 인증샷이 올라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정치적 인물을 다루는 것에 대해 적절치 않다고 언급했다. 자칫 논란이 커지면 의도와 다르게 비난 받을 수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굳이 정치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을 선정한 배경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GS리테일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인물 선정은 보훈처가 추천했을 뿐 자체적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

GS리테일 관계자는 “독립운동가 스티커는 보훈처가 추천한 인물을 고른 것”이라며 “논란에 대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keon@news1.kr

조선 최초 사회주의 운동가라며 알렉산드라 김 역사 주요인물로 내세우는 공영방송

조선 최초 사회주의운동가, 여성운동가라며 김알렉산드라 라는 여자를 역사의 주요인물로 내세우는 공영방송 KBS 입니다




1908년 3월 8일.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가 뉴욕 거리를 메운다.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한 여성들! 그들의 외침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로부터 9년 후, 러시아 거리에도 여성들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억압과 차별에 맞선 이들의 함성은 2월 혁명으로 이어진다. 제정 러시아의 붕괴를 초래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바로 이 현장에 김알렉산드라가 있었다?

1918년 러시아. 조선인 여성 한 명이 체포된다. “조선인 후진들은 들으시오. 내가 방금 걸은 열세걸음은 조선의 13도입니다. 조국을 해방시켜 온 세상에 자랑하시오. 조선 독립 만세!” 죽음의 순간까지 독립을 염원한 그녀의 이름은 바로 김알렉산드라! 조선 최초 사회주의자였던 김알렉산드라, 그녀는 왜 역사에서 지워진 걸까?


그녀의 아버지 김두서는 1869년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에 정착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익히고 통역을 하게 되는데… 그런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통역사가 된 김알렉산드라. 통역사가 된 그녀는 노동자를 대변한 아버지처럼 노동자 권익을 위해 힘쓴다. 그때, 페름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알게 되는데… 과연 그녀의 선택은?

노동자들을 위해 페름으로 향한 김알렉산드라! 그곳에서 아버지의 나라, 조선에서 온 소년들을 만난다. 소년들의 정체는 바로 나자구 무관학교 생도들! 알렉산드라는 폐교된 학교를 살리려는 생도들을 보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깨닫는다. 그 시기, 나자구 무관학교의 설립자 이동휘가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는데…생도들과 알렉산드라의 만남이 가져온 변화는?
이동휘는 알렉산드라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둘은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한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이 한창이었는데…반혁명군 세력에 일제가 동참하면서 한인들은 혁명군 세력을 지지한다. 혁명을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대립으로 생각한 독립운동가들 역시 반혁명군과 맞서 싸운다. 그들의 선봉장이었던 김알렉산드라! 죽음의 순간을 통해 그녀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을 되짚어본다.

항일 독립운동의 한 획을 그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3월 10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1 TV <역사저널 그날> ‘역사가 지운 이름, 붉은 김알렉산드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전북일보(http://www.jjan.kr)

“난 볼셰비키” … 총살된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주류였다. 내부에 많은 파쟁이 있었고 민족주의자들과 많은 다툼도 겪었지만 이 시기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세력이었다.
6·25 남침으로 이런 인식이 근본적 변화를 겪게 되지만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은 이제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① 사회주의 정당 창립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3월(러시아력 2월) 만주 북단 아무르강(흑룡강) 강변의 도시 하바롭스크에 일단의 한인들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췌코프가 주최하는 조선혁명가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동녕·양기탁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 등 민족주의자들, 이동휘·류동열 등 민족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김알렉산드라·오하묵·유스테판·오와실리 같은 볼셰비키들이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재러시아 한인들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두 노선이 대립했다.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은 러시아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볼셰비즘까지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오하묵 같은 볼셰비키는 물론 이동휘·류동열 같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볼셰비즘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은 이탈했지만 볼셰비즘에 찬동하는 한인들이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다시 모여 한인사회당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한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김립 등 민족적 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주한 한인들의 자녀들인 김알렉산드라, 오하묵, 박애(마뜨베이 박) 같은 귀화 2세들의 연합전선체였다. 한인사회당은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이동휘를 선임하고 군사부장 류동열, 선전부장 김립 등을 선임했는데 산하에 조직부·선전부·군사부 등 3개의 집행부서와 출판사 보문사(普文社)를 두고 한국 역사·지리서 등 교과서와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했다.

한인사회당 창립 두 달 후쯤인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이 반(反)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극동지역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체코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군으로 동부전선에 출전했다가 러시아에 포로가 된 체코군단을 뜻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이 체코군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1918년 2월 공동 출병하면서 시베리아 정세가 급변했는데, 속셈은 러시아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차르 체제를 지지하는 백위군(白衛軍)은 천군만마를 얻은 반면 볼셰비키 세력은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내전은 다시 백위군의 우세로 돌아섰고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하바롭스크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동휘 등은 러시아 내전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류동열과 김알렉산드라 등 100여 명의 한인은 조선인 적위군(赤衛軍)을 조직해 카르미모프가 지휘하는 백위군과 맞서 싸웠다. 전황은 볼셰비키에 불리해져서 극동인민위원회와 한인사회당도 하바롭스크를 떠나 아무르주(흑룡주)로 이전해야 했다. 하바롭스크가 백위군에 함락된 이틀 후인 9월 10일 류동열·김립·김알렉산드라 등은 마지막 탈주선인 ‘바론 코르프(남작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롭스크를 떠났지만 도중에 백위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백위군은 즉결심판으로 류동열·김립 등 10여 명의 한인들을 석방하고 김알렉산드라 등 18명에겐 사형을 선고했다. 마트베이 김(Matvei Timofeevich Kim)은 김알렉산드라의 전기에서 백위군 장교가 “조선인인 그대가 왜 러시아의 시민전쟁에 참가했는가?”라고 묻자 “나는 볼셰비키다…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답하고 총살당했다고 전한다.(반병률, 김알렉산
드라 페트로브나의 생애와 활동)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2년(1920) 4월 17일자, 20일자, 22일자에 ‘뒤바보’란 필명으로 ‘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을 연재했는데 김알렉산드라의 부친은 함경북도 경흥에서 기사년(己巳年·1869년) 대흉년 때 러시아로 이주한 김두서(金斗瑞)였다. 1885년생인 김알렉산드라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폴란드인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손에 양육되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이후 러시아 혁명운동에 나서 1917년 극동지방 조선인 조직사업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김알렉산드라의 처형은 이동휘 등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1920년 1월 22일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오하묵 등 한인들이 결성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는 이후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면서 상해파로 불린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는데 김알렉산드라가 살아 있었다면 이동휘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1919년 9월 김립과 사위 오영선을 대동하고 상해에 도착해 임정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의 국무총리 취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동휘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와 이 조직이 확대된 대한국민의회 주요 구성원이었는데,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등이 이동휘의 임정 참여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동휘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임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자파로 끌어들이려는 계산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국무총리 이동휘가 경무국장 김구에게 “우리(임정) 독립운동은 민주주의인즉 이대로 독립을 한 후에도 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민족의 대불행인즉 적은이(김구)도 나와 함께 공산혁명을 하자”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때 김구는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지 않고 공산혁명을 할 수 있느냐”면서 거부했지만 여운형 등은 이동휘가 상해에서 만든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담했다.

이동휘 등은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개최하고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이것이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다. 하바롭스크의 한인사회당이 모태인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민족주의 좌파 계열의 사회당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고려공산당 및 전로공산당의 개황(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ノ梗槪(1923)에 따르면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유력한 정부의 원조를 얻기 위해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 이동휘의 이런 전략은 주효해 레닌으로부터 40만 루블이라는 거액을 지원받기도 했던 것이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결성되던 1921년 5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고려공산단체 중앙위원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것이 시종 상해파와 경쟁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었다. 이처럼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은 두 파가 모두 해외에서 결성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사회주의 운동도 나라를 빼앗긴 민족모순의 규정성이 강했다는 뜻이다.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이 계급해방 투쟁보다 민족해방 투쟁 운동으로 인식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파는 모두 고려공산당이란 명칭을 사용했지만 민족주의와 연합전선을 둘러싼 노선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이르쿠츠크파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상해파는 적극적이었다.

양파가 대립하자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이 조정에 나섰다. 그 결과 1922년 10월 19~28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양파의 통합을 위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열렸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 보관소의 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르쿠츠크파 60명, 상해파 72명 등이 참석했고 한국의 중립공산당도 2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10월 23일 제3차 회의에서 장건상이 “이르쿠츠크에서 온 대표자들이 대회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나도 이 그룹의 지지자이기 때문에 대회장을 떠나겠습니다”라면서 떠난 것처럼 통합대회는 난항을 겪었다. 이때 러시아 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보스트뜨이세프는 “나는 그들(이르쿠츠크파)이 퇴장한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코민테른 측은 두 파가 통합된 고려공산당이 출현해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를 바랐지만 쉽지 않았다. 10월 26일 열린 제10차 회의에서 보스뜨이세프가 ‘극동에서 백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블라디보스토크가 함락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자 박수와 만세 소리가 대회장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회의에 참석했던 정재달이 “이르쿠츠크파는 전부 치타로 철수하고 말았다”고 회고한 것처럼 끝내 통합에는 실패했다. 대회에서는 이른바 레닌 자금 40만 루블의 사용처 문제로 다시 큰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 문제는 두고두고 이동휘를 괴롭혔다.

연합대회의 요약보고서는 이동휘에 대해 “좋게 말해도 그는 낭만적인 민족주의자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코민테른도 이동휘가 볼셰비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파가 거부한 당을 한인 유일의 공산당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하고 코민테른 극동부(동양비서부) 산하에 꼬르뷰로, 즉 고려국(高麗局)을 설치했다. 한인공산당 조직문제가 꼬르뷰로로 이관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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