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사회주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문 정권의 촛불은 국민 속이는 사이비 사회주의(이인호 컬럼)

러시아의 급진적 인텔리겐찌야의 혁명지상주의

사회구조 개혁이라는 당위 앞세워 도덕적, 인격적 파탄

문재인 정권이 부르짖는 ‘촛불혁명’, ‘적폐청산’…아름다운 구호로 국민 속이는 사이비 사회주의

조국 법무장관 임명 강행…문재인 정권의 정체 보여줄 것

러시아에서 혁명 열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09년. 급진적 인텔리겐찌아 세계에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러시아 1898년에 사회민주노동당(마르크스주의 정당) 창당선언문을 집필했던 스트루베를 포함한 혁명운동의 거두 7명이 [향방표식]이라는 논문집을 발간하여 급진적 인텔리겐찌야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후에 철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게 된 베르쟈예프를 위시한 7인은 각기 다른 주제로 논문을 썼지만 공통된 지적이 있었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그때 가지 걸어온 그 길로 계속 간다면 기존의 전제체제가 무너진 다음에 권력은 이상주의적 혁명가들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인민을 위한다는 이타적 영웅심에서 출발한 혁명은 결국 인민을 더 큰 고통으로 내 모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 였다.

베르쟈예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혁명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은 정의에만 목 말라 하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진리와 허위, 진실과 위선을 가릴 줄 몰랐다. 외래의 신사조에만 휩쓸릴 뿐 스스로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기르지 못했다. “혁명적 허무주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쓴 프랑크에 따르면 인민대중을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고 결론 낸 급진적 인텔리겐찌야는 혁명지상주의에 휘말리면서 살인과 파괴를 미화하는 도덕적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고 도덕적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키스챠코프는 악법과 투쟁을 하다 보니 법이 있어야 인권이 보호될 수 있다는 것 까지 망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했고 이즈고예프는 어른들이 정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다 보니 어린 학생들이 민중의 대변인, 구세주를 자처하고 나서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 사회는 정신적 어린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했다. 성직자의 아들로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가 “경제의 철학”이라는 논문을 쓰면서 사회학자와 정교신학자로 후에 이름을 날리게 된 불가코프는 사회제도와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자세 사이의 관계문제를 강조했다. 사회구조나 제도를 혁신하는 것 만으로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 개개인의 도덕적, 인격적 품성이 중요한 변수였다. 편집 책임자였던 게르쉔존은 혁명적 파괴만 일삼아온 인텔리겐찌야는 경찰 같은 질서수호 전문가들의 역할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를 깨닫고 인정할 줄을 모른다면서 혁명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고 호소했다

레닌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년 동지들의 이러한 충정 어린 비판은 용서할 수 없는 “배반”이었고 가차없는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실 러시아 혁명운동의 혼탁한 물결은 이미 지식인 거두 몇 사람의 힘으로 거슬르기에는 너무 거세었다. 혁명은 [향방표식]의 필자들이 예언했던 대로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세력의 승리, 곧 레닌의 공산당 일당독재체제, 스탈린의 “개인숭배” 체제로 귀결되었고 러시아는 전체주의적 독재체제 아래서 70년의 역사적 시간을 상실하며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다.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우리 대한민국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향방표식] 필자들의 우려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을 창출해낸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혁명가”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촛불혁명”을 내세우지 않았는가? “적폐청산”을 말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치적 표적들은 곧 바로 “법”의 이름으로, 약자 보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응징하는데 그들 만한 신속함과 단호함을 보인 정권이 있었는가? 그런데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은 2017년의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부족함을 안고 있기는 했었지만 그보다 백년 전의 러시아 처럼 혁명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던 나라는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촛불혁명” 주체들은 자기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통상적 의미의 혁명, 곧 주권의 주체와 국가의 이념을 전복시키는 행위 임을 솔직하게 대한민국 국민에게 알리고 대중의 동의를 얻는 적이 없었다. 문재인 정권은 시발점부터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불식과 “강자의 횡포 및 부패척결”, 남북간의 “평화관계 수립”등 이름다운 구호로 국민을 속임으로써, 다시 말하면 수단과 방법을 자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 한 것이지 자기들 주사파의 좁은 테두리나 갑작스런 “민주화 보상금” 지급에 혼을 빼았긴 국민 일부 이외에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절대다수로부터 자기들이 의도하는 친북 또는 사이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명백한 동의를 얻고 지지기반을 구축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들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문재인 정권처럼 당당한 자세로 삼권분립체제를 무시하고 표리부동과 정치적 이중성을 들어내며 적반하장으로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정권을 보기는 쉽지 않다. 오직 자유언론이 사라지고 정권의 나팔수들만이 힘을 쓰며 “적폐청산”의 명분아래 일종의 공포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나라에서나 그런 정권이 유지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요즘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임명문제를 둘러싸고 일고 있는 부패 논란은 문재인 정권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정권인가를 들어내주는 사례일 뿐 놀랄 일도 아니다. 어느 부처이고를 막론하고 장관이란 그 분야의 최고 책임자요 최고로 유능한 공복이어야 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전세계의 상대역과 맞서서 힘을 겨룰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어느 공직자 한 사람이라도 국민 전체 가운데서 그런 최고의 실력자라고 선 뜻 나설 사람이 있는가? 끼리 끼리 “해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여기는 풍조가 이제는 집권여당은 물론 야당이나 국민전반에 까지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수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줄을 잘 선 적분에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며 그런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나라 살림을 맡아 하는 한 대한민국이 점점 더 기우러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의 법무장관 임명을 강행하다면 문재인 정권의 정체가 무엇이며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자명해진다. 공수처 법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경찰국가로 만들고 내년 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를 장악한다면 곧 바로 연방제 개헌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권의 영구집권의 꿈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지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국민을 다시 한번 속이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미국이나 일본이 그대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며 북한도 중국도 러시아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예측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기가 꺾이거나 축출되지 않고 지금의 길로 그대로 나간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물론 남북한 동포 모두가 끔찍한 불행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점이다. 불과 3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많은 세계인들이 흠모의 눈으로 주목하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국제정치에서 치지도외시 당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가 미국의 굳건한 동맹으로 남아 있었다면 북한도 일본도 우리를 지금처럼 업신여기지 못했음을 몰론 미국과 중국의 경제대결에서 발생하는 어부지리가 우리 몫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역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문재인 대통령과 동일시 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안위는 미국의 대중 또는 대북 정략에서 거의 고려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날 수도 있는 것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전통적, 적대적 관심일 것이다.

북한과 경제력을 합치면 일본의 경제력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언을 하고 조국 같은 부도덕한 인물을 법무장관으로 기용하겠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대가를 모면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이제 남아 있는 선택이란 어떤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그나마 가장 희생이 덜 할 것인가 하는 것 뿐일 것이다.

이인호 객원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68

조국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실체

조국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실체

조국 교수는 서울법대 82학번 출신으로 1992년 [사상과 자유]라는 책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을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는 이듬해 울산대 교수 재직시절이던 1993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노맹은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으로 그 조직원이 3500명에 달했다. 1989년 11월 결성된 사노맹은 발족 직후부터 삐라를 뿌린 것이 단서가 되어 3년 동안 대대적인 수사발표가 2차례 이뤄졌다.

사노맹은 89년 11월 서울시 경찰이 성균관대학교의 서울민주주의학생총연맹(서민학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노맹 출범선언문을 배포하려던 학생을 적발한데서 꼬리를 잡혔다. 경찰은 서민학련과 사노맹 사이에 굳은 연대가 있다고 보고 수사를 전면 확대하여 노동문학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1990년 10월 1차 수사중간발표를 통해 사노맹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하고 총책 이정로(본명 백태웅)와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본명 박기평)를 공개 수배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들은 1989년 2월, 불법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노동자 중심 정당을 조직하기로 모의하여 같은 해 11월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

백태웅의 가명 이정로는 ‘이것이 정통정치노선이다’의 준말이고, 박기평의 가명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무력혁명의 기반을 전국에 깔기 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이들을 세포분열식으로 확대해 나가며 ‘공장의 혁명 요새화’를 꾀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키며 총파업을 벌이도록 선동한 후, 결정적 시기에 무장 봉기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1990년도 중점 목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원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를 세웠다.

이 목표들은 단어만 약간 순화된 형태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이름으로 이미 달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 무기탈취계획, 독극물 개발 등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며 전국 각 시도마다 지방위원회를 설립해 점조직적으로 뻗어나갔다. 사노맹은 각 분야마다 ‘혁명인자’를 물색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끔 한 후 50여 가지 심사를 거쳐 특수공작원으로 삼았다.

이들은 사노맹에게 최대 1년에 이르는 사상교육, 체력훈련을 받은 후 무장봉기 계획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을 10여 개 확보한 후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해 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요새화했으며 검거 때는 문서는 즉시 소각, 메모지는 목구멍으로 삼키도록 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사노맹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자살용 독극물 캡슐을 부여받았다.

사노맹은 1994년까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한다는 중간목표를 위해 공장을 혁명요새화 시킬 목적으로 서울, 광주 등 전국 16개 지역의 69개 공장에 조직원 3백여 명을 침투시켜 비밀결사 조직을 만든 후 폭력 파업투쟁과 정치투쟁을 유도했으며 전국의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까지 포섭,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시켰다.

중요인물들이 전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검거당하면서 사노맹은 와해되었다. 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은 각각 6~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인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전부 풀려났다. 이들은 2008년 12월 22일 민주화운동보삼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렇듯 조국 교수는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써 교편을 잡아왔다. 문 정권 집권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에 이어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에 앉히려는 것이 문 재인 정권의 실상이다.

http://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20573

사노맹

1989년 겨울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서울대에 유인물이 뿌려졌다.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로 살라버리고자 전 자본가 계급을 향해 정면으로 계급 전쟁의 시작을 선포한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출범 선언문이었다. 드러내놓고 계급혁명을 표방해 충격을 줬다. 1989년이면 6·29 선언으로 헌법이 바뀌고 대통령 직선이 이뤄지는 등 민주화가 사실상 이뤄진 때였다. 하지만 운동권은 이미 ‘민주화’가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운동권 주류는 NL 주체사상파였다. 그 반대편에 PD 민중민주 계열이 있었다. 사노맹은 NL과 PD에서 한 글자씩 따서 ND라고 칭하면서 ‘제3의 길’을 추구했다. 사노맹 수사를 했던 검사는 “북을 비난하면서 남한 자체 사회주의 지도부를 표방하던 독특한 반국가 단체”라고 했다. 반국가 단체는 북 정권이 대표적이다. 국내 반국가 단체는 대부분 북과 연계된 조직·집단이었다. 사노맹은 북과 상관없이 반국가 단체 판결을 받은 드문 경우다.

▶왜 그런지는 수사와 재판에서 드러났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사노맹 투쟁 슬로건엔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분배’ ‘민중위원회 설치’가 들어 있고, 목표는 ‘특공대가 총파업을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 사회주의 혁명 달성’이라고 했다. 레닌의 당조직 원리를 따랐는데 중앙위 아래 연락국은 폭발물 개발, 무기 탈취, 독극물 개발 임무를 맡는다고 돼 있다. 조직원 검거에 대비해 가스총, 염산을 비치해두고 자살용 독약 캡슐도 개발 중이었다고 한다. 법원은 “무장봉기를 통한 (남한) 체제 전복을 추구해 온 점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90년대 초반 주동자였던 시인 박노해(중앙위원)씨와 서울대 학도호국단장 출신 백태웅(중앙위원장)씨 등이 검거되면서 사노맹은 와해됐다. ‘남로당 이후 최대 자생적 좌익 지하조직’이라고 했다. 박씨와 백씨는 김대중 정권 때 준법서약서를 쓰고 풀려나 사면을 받았다. 로스쿨 교수가 된 백씨는 “미숙한 점이 많았다”고 했고, 박씨는 “급진적 사회주의에 치우친 점 반성한다”고 했다.

▶그 사노맹이 요즘 다시 화제다. 사노맹 산하 조직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 활동으로 국보법 위반 유죄를 받은 조국 전 민정수석이 다른 자리도 아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법치를 수호해야 할 법무장관 지명을 받으면서다. 야당은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이게 말이 되느냐”고 하고 여당은 “색깔론”이라고 엄호한다. 조 지명자는 “(사노맹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는데 청문회에서 어떤 해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3/2019081303236.html

국가 전복을 꿈꾸던 사노맹 사건 주범이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 절대 안된다

한국당 “조국, 사노맹 연루” 색깔론 공세…민주 “구태정치”

“국가 전복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2일 ‘조국 법무부 장관 불가론’을 펴면서, 조 후보자가 과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사실을 거론했다. 조 후보자에 대한 한국당의 공세가 도덕성·자질·이념 등 전방위에 걸쳐 펼쳐질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런 황 대표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구시대적 색깔론으로 막무가내식 정치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황 대표는 이날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조국 후보자는 과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관련 사건으로 실형까지 선고받았던 사람”이라며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안보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이런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되면 검찰이 과연 제대로 공정한 수사를 할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조 후보자는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3년, 사노맹 산하 기구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설립에 참여한 혐의(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가입 등)로 불구속기소됐다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황 대표는 조 후보자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서 여러 인사검증에 실패한데다 에스엔에스(SNS) 정치로 국론 분열을 일으키고, 김태우 전 검찰수사관이 폭로했던 민간인 사찰, 블랙리스트 의혹에 연루됐다며 지명 철회를 압박했다.

당 차원에서도 조 후보자 청문회를 앞두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 조 후보자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로 청문위원 투입이 확정된 김진태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국은 내가 잘 안다”는 글을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당 지도부는 청문회를 통해 집권세력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고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 자신들을 옭아맨 ‘친일 프레임’도 떨쳐내겠다는 구상이다.

조 후보자를 겨냥한 황교안 대표의 공격에 대해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30년 전 사건까지 꺼내 들어 해묵은 ‘좌익’ ‘용공’으로 흠집 내는 구태 정치”라고 역공했다. 홍 대변인은 그러면서 “조 후보자는 사노맹 사건으로 투옥 직후 국제앰네스티 선정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됐고, 2008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했다’며 사노맹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재평가했다”고 반박했다.

청와대는 조 후보자 등 개각 대상자에 대한 인사청문요청안을 14일 국회에 발송하기로 했다. 청문요청안 발송 뒤 20일 안에 청문 절차를 마치도록 한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국회는 다음달 2일 전에는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청문보고서 채택 무산에 따른 송부 재요청 기간까지 고려하면 늦어도 추석 전 장관들에 대한 임명 절차가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조국 대전’이 펼쳐질 법사위는 27일쯤 청문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 중이나 한국당이 연찬회 일정과 겹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어 다음달 초로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

정유경 장나래 기자 edge@hani.co.kr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464387

조국(曺國) 교수 연루 ‘사노맹’ 사건의 실체

사노맹, 조직원만 3천5백 명에 달했던 ‘사회주의 전위조직’

金泌材

서울 법대 82학번 출신의 조국(曺國) 서울대 교수는 1992년 《사상과 자유》라는 책을 펴내 국보법 폐지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다.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던 1993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건에 연루, 국보법 위반 혐의로 實刑(실형)을 선고받았다.

曺 교수는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에 대한 공개지지를 선언한 뒤 朴씨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작가 공지영(영화화 된 소설 「도가니」의 원작자), 이외수(작가), 문소리(영화배우), 유홍준(前 문화재청장) 등의 인사들과 함께 ‘멘토단’ 내에서 활동했었다. 曺 교수가 연루됐던 사노맹 사건의 실체는 아래와 같다.

▲ 사노맹, 勞使현장에서 ‘공장의 혁명 요새화’ 주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조직원이 3천5백 명에 달하는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非(비)합법 사회주의 전위조직이다. 1989년 11월 결성된 사노맹은 발족 직후부터 유인물을 배포한 것이 단서가 되어 3년 동안 대대적인 수사발표만 2차례나 이뤄졌다.

이 사건은 1989년 11월 서울시경이 성균관대의 서울민주주의학생총연맹(서민학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노맹 출범선언문을 배포하려던 학생을 적발한데서 단서가 잡혔다.

경찰은 서민학련이 사노맹에 깊이 관련됐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 노동문학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관련자들을 속속 체포했다. 안기부는 1990년 10월 1차 수사중간발표를 통해 사노맹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하고 총책 白泰雄(백태웅, 서울대 법대 4년 제적)과 사노맹 중앙위원이자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등을 수배했다.

안기부에 의하면 백태웅과 박노해는 1989년 2월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하고 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자들을 모은 뒤, 같은 해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주최 건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고 밝혔다.

백태웅의 假名(가명) 이정로는 “이것이 정통정치노선이다”의 준말이고, 박기평의 假名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이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세포분열식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이른바 ‘공장의 혁명 요새화’를 꾀했다.

▲ 사노맹, 사회주의 혁명 달성 목표 삼아

사노맹은 노사분규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해 사회주의혁명 달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한 1990년도 중점수행과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언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 슬로건으로 삼았다.

사노맹은 또 레닌의 ‘黨(당)조직 건설원칙’을 모방해 중앙위원회를 최고지도부로 하고 그 밑에 조직위 ,편집위 각 市都(시도) 지방위를 두었다. 부설조직으로는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학생연맹을 두었다, 조직원 파견그룹으로는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학사 등을 두고 단위조직을 철저히 비밀 운영했다.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사무국과 조직수호, 면학, 유인물, 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 무기탈취계획, 독극물 개발 등의 특수 임무를 맡았다. 지방조직으로는 서울을 비롯, 전국 9개 시도에 지방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기획선전 담당부서 공장사업부 정파사업 담당부서를 설치해 정치-노동-종교계에 조직원 扶植(부식)을 꾀했다. 사노맹은 각 분야 ‘혁명인자’를 물색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 한 뒤, 사상성 비밀활동 능력 등 50여 가지 기능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이들은 1개월 내지 1년의 사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전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았다.

이들은 또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安家(안가)를 확보해 놓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해 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두었으며, 검거 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시 소각 또는 삼키도록 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했다.

사노맹 조직원들은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1인당 3백만 원 내지 1천만 원씩 책임제로 모금하고, 친지 집을 상대로 强竊盜(강절도)를 하거나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을 받아 속셈학원, 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했다.

사노맹은 혁명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합법적인 월간지 《노동해방문학》과 출판사 노동문학사를 설립, 1989년 4월~12월까지 15만여 부의 선전 책자를 발간했다. 백태웅은 이정로라는 가명으로 《노동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사회주의 위기의 근원, 고르바쵸프 개혁노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이 월간지에 <파업에 나선 노동형제들에게>, <김우중 회장의 자본철학에 대한 전면비판> 등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1989년 4월 《박노해 시인의 긴급 호소》라는 유인물에 “현실적 통일방안을 가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내용의 <존경하는 김주석>이라는 詩를 게재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박노해의 부인인 金眞珠(김진주)는 한승호라는 假名으로 《노동해방문학》에 “노선 없는 실무가가 주도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경향성을 비판하다”등의 글을 기고했다. 사노맹은 非합법 지하기관지 《한걸음 더》, 《새벽바람》과 유인물 《긴급전술 결의》등 40여종 20만부 가량을 제작, 전국 대학과 노동현장에 뿌렸다.

사노맹은 각 운동단체를 VDR(민족혁명) 노선으로 통일하기 위해 민중당, 인민노련, 전노협,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정파투쟁’을 전개하고 《노동자신문》,《말》지 대학신문 등의 기고문을 통해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이념 전파 및 타 정파와의 사상투쟁을 벌여왔다. 또한 ‘공장의 혁명 요새화’ 원칙에 따라 무장봉기 때 방위사업체인 창원공단 내 (주)통일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 대상으로 선정했다. 인천지방위원회에서는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하며 무장봉기 계획을 세웠다.

▲ 총책 백태웅, 중앙위원 박노해 검거로 와해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는 1991년 3월, 중앙위원장인 백태웅은 1992년 4월에 다른 조직원 30여명과 함께 각각 검거됐다. 백태웅의 경우 검거되기 5일전인 24일, 박노해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박노해는 1991년 9월 1심 선거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2심 선거공판에서도 역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백태웅의 검거로 사노맹은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고 사건수사도 일단락됐다. 안기부는 백태웅을 검찰에 송치한 1992년 5월 사노맹이 전국의 공장과 대학에 훈련된 조직원들을 침투시켜 결정적 시기에 정부를 폭력으로 뒤엎고,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려 한 지하혁명 조직으로 드러났다고 추가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은 고교생들까지 포섭,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등 남로당 이후 최대 조직으로 파악됐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또 사노맹이 1994년까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한다는 중간목표 아래 공장을 ‘혁명요새화’ 할 목적으로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16개 지역의 69개 공장에 조직원 3백여 명을 침투시켜 공장소조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폭력 파업투쟁과 정치투쟁을 유도했다고 발표했다.

사노맹은 조직의 안전을 위해 조직의 이름을 일반 회사식 이름으로 불렀다. 예컨대 사노맹 중앙위원회는 대우자동차, 수도권위원회는 제일물산, 영남위원회는 삼테크, 호남위원회는 한양교통 등으로 부르고, 조직원의 직책도 실장, 부장, 과장 등으로 불러 외부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사노맹 사건 관련자들 중 玄廷德(현정덕, 사노맹 연락책)은 징역 8년을, 박노해의 부인인 김진주는 징역 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유죄판결을 박은 사노맹 관련자들은 김대중 정권이 출범시기인 1998년 8.15 특사 때 백태웅, 박노해, 남진현이 석방되어 전원이 자유의 몸이 됐다. 백태웅과 박노해는 2008년 12월22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참고자료>

1.《한국진보세력연구》, 2009, 남시욱 著, 도서출판 청미디어

2.《조선일보》 1989년 11월15일자, 1990년 10월31일자, 1992년 5월16일자, 1991년 3월12일자, 1991년 3월16일자, 1991년 7월31일자, 1991년 8월28일자, 1992년 4월30일자, 1991년 9월10일자, 1991년 12월30일자, 1992년 4월25일자, 1998년 8월15일자, 2008년 12월27일자 보도 인용

3.《사노맹 총책 박노해 조사결과》, 1991년 4월3일, 국가안전기획부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2/07/06/2012070600019.html

도날드 트럼프 ‘사회주의는 죽었다.’ (2019.2.18 마이애미 연설 중)

사회주의는 번영을 약속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것은 빈곤입니다.
사회주의는 단결을 약속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것은 증오와 분열 뿐입니다.
사회주의는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언제나 과거의 암흑기로 돌아갑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역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 슬프고 ‘용도 페기된 사상’입니다.
그것이 사회주의가 예외 없이 독재 정권을 낳는 까닭인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다양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절대적인 순응을 강요합니다.
사회주의는 정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평등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회주의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단 한가지, 지배 계급을 위한 권력 뿐입니다.
그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질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의료 서비스를 운영하고 싶어 하고, 교통과 금융을 운영하고,
에너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것을 운영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정권입니다.

즉, 누가 이기고, 누가 지게 될지, 누가 올라가고 누가 내려갈지,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심지어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지를…
사회주의는 진보라는 깃발 아래서 나아가지만
그것이 결국 가져다주는 것은 부정과 착취와 부패일 뿐입니다.

미국에게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세력들에게 우리는 다시 한번 분명한 메세지를 전합니다.
미국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군의 뿌리? – 공산주의자 김원봉의 사상과 행적

김원봉, 6·25장관 맡아 군수 지원점령지 통제지휘도

[김원봉 논란] 1948년 월북후 反대한민국 행적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김원봉(1898~1958)이 자발적으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미국 기밀문서가 7일 발견됐다. 여권과 학계 일각에선 김원봉의 월북이 해방 후 ‘친일파 경찰’에 체포돼 심문받는 수모 등을 겪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를 뒤집는 얘기다. 김원봉은 6·25전쟁 기간 북한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냈다. 검찰총장, 노동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다. 김일성 정권의 ‘전쟁 지도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이자 애국으로 연결시켰다.

◇美 문서 “김원봉, 스스로 ‘좌파’로 인식”

6·25 당시 미 극동군과 제8군을 주축으로 편성됐던 ‘주한 유엔 유격군’은 전쟁 기간 빨치산 관련 첩보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 국방부에 전달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인 300여쪽의 이 보고서엔 ‘김원봉’ 관련 항목이 포함돼 있다. 1953년 3월 19일 자 보고서는 김원봉의 월북 경위에 대해 ‘스스로를 좌파(leftist)로 인식했고, 삼촌(uncle·실제론 인척)인 김두봉(북한 초대 국가수반)과의 관계 때문에 서울을 떠나 1946년(실제론 1948년) 월북했다’고 기록돼 있다.

1기 北내각서 장관직 오른 김원봉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둘째가 김원봉(국가검열상)이다. 앞줄 왼쪽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1기 北내각서 장관직 오른 김원봉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둘째가 김원봉(국가검열상)이다. 앞줄 왼쪽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립중앙도서관

이 보고서는 김원봉의 광복군 경력을 언급하며 “중국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의 설득에 넘어간 김원봉이 중국 남동부의 국민당군(Nationalists)을 지원하는 대신, 중국 북부의 중공군 공산주의자(Communists)를 지원했다”는 부분도 들어 있다. 당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국민당 정권과 협력해 항일 전쟁을 하던 때였다. 보고서에 적시된 사실들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원봉은 국민당 군(軍)과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고 했다.

◇”김원봉, 6·25 남침 인력·무기 동원”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등에 따르면, 월북 이후 김원봉은 1948년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통해 9월 9일 초대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지금의 우리로 치면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이 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그는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에 이어 7번째 내각 멤버로 적시됐다. 김원봉은 같은 해 11월 미군 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을 홍명희 등과 함께 발표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를 구성했는데,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김원봉의 이름을 올렸다. 6·25전쟁 초반 북한이 점령한 대한민국 영토에서 우리 정부의 권력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이식하는 소위 ‘안정화 작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1년 5월 김일성은 ‘공화국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를 맡은 김원봉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국내 일각에선 “김원봉이 6·25 전쟁을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52년 3월 김원봉은 북한 정권이 수여한 ‘노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에 올랐다. 당시 노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꾼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것이다.

그해 5월에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노동부 장관)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전시(戰時) 노동상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에 관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6·25전쟁 후 김원봉은 1954년 전국열성자대회에 참가하고, 1955년 헝가리 해방 10주년 기념축전 대표단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월북해 6·25 공훈으로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우리 대통령이 6·25 순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국군의 뿌리’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8/2019060800058.html

대통령 문재인이 급칭송한 김원봉에 대해 알아보자

코민테른 자금 받아 의열단 활동, 중국 정부 지원받아 조선의용대 조직, 의용대에서 왕따 당한 후 임시정부와 손잡고 광복군 부사령관, 해방 후엔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폭력·암살·파괴 독립운동의 대부(代父). 1948년 남북협상 위해 월북했다가 북에 정착하여 노동상, 국가검열상을 역임하며 이승만 노선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 김원봉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인물을 지속적으로 띄워야 하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먼저 현충일 기념사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은 다른 날도 아닌 6월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급칭송했다. 대체 김원봉이 누구이기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든 국립현충원에서, 그 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날을 골라 칭송을 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김원봉이 해방 공간에서 월북하여 북한 탄생에 일조했고, 북한을 위해 일했다는 원죄를 바탕으로 그의 활동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택했던 그 길과 방법론이 과연 이 민족, 이 국가가 나가는 장도(壯途)에 있어 올바른 방향이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을 따름이다.

김원봉은 무력·폭력·암살·군대 조직 등의 방법을 통해 ‘강도 일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나섰던 대표적인 무장 독립투쟁론자였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동포들의 궐기가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선명한 폭력투쟁이었다. “끊임없는 폭력만이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마침내 조국광복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길”(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 샘, 2000, 31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서 1~2개월 동안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코민테른 자금 지원받아 의열단 활동

1919년 11월 9일 중국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3·1운동의 미지근한 비폭력 투쟁의 비판적 대안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전개키로 한 것이다. 단장에 해당하는 의백(義伯)에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김원봉의 의열단 활동에 대한 김삼웅의 평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으로 테러 활동을 숭상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 용사들로서 오직 모험적인 행동만이 능히 일제의 식민통치를 뒤엎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망국의 치욕을 자기들의 피로써 능히 씻을 수 있다고 믿었다.”(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 창, 2019,88쪽)

의열단 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중요한 자금 제공자는 소련공산당, 즉 코민테른이었다. 그는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이념과 노선을 따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아나키스트가 그가 추구했던 길이다.

김원봉은 베이징에 의열단 본부를 두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신채호·박용만·이회영 등과 손을 잡았다. 그가 임시정부에 등을 돌린 것은 안창호로부터 “폭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쌓은 후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거사할 것, 모험 행동을 피하고 필요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한상도, 「1920년대 의열단의 노선 재정비과정」, 『독립운동사의 제문제』, 범우사, 1992, 168쪽).

베이징파 요인들이 상하이에 와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타도 시위를 할 때 김원봉도 여기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을 때,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의열단원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차하면 암살이요, 테러를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은 “왜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동포”라고 말했을 정도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소속 공산주의자로서 상해 임정은 출범부터 좌우합작 형태를 취했다. 그러니 이념갈등, 지역갈등, 노선갈등으로 자고 일어나면 싸웠고, 회의가 열렸다 하면 아귀다툼이 일었다.

이동휘는 소련이 제공한 40만 루블의 지원금을 임시정부 자금으로 내놓지 않고 고려공산당 운영자금으로만 사용했다. 소련은 임시정부를 뒤흔들어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 정부로 돌려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 이동휘에게 엄청난 금액을 지원한 것이다. 소련공산당이 제공한 40만 루블 중 일부가 의열단에 제공되었고, 의열단은 이 돈이 소련공산당의 돈이란 사실을 알고 활동자금으로 썼다.

의열단과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 동아일보는 “(의열단은) 계속하야 각종 음모를 계획하여 왔으나 재정의 궁핍으로 자금을 변통하기에 고심하던 차에 마침 로국공산당(소련공산당)이 일부 조선인을 이용하여 적화선전을 하려고, 단장 김원봉도 자금을 얻어서 목적한 계획을 달함에는 공산당과 악수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하여 대정 10년 말 경에 드디어 공산당과 결탁…”이라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23년 4월 12일).

민중이 우리 혁명의 대본영,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

의열단의 투쟁을 기리기 위해 쓴 글이 신채호의 ‘의열단 선언’이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한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준비론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러한 독립운동 방략은 칼 한번, 총 한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국의 처분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라며 질타한 것이다.

신채호와 의열단원들이 원했던 노선은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였다. 즉 폭력적 암살·파괴·폭동을 줄기차게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또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2000만 민중이 일치하여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의열단 선언’을 끝맺고 있다.

<민중이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손을 잡고 함께 간다는 뜻)하야, 부절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 무렵 이승만은 의열단이 추구했던 암살·파괴·폭력투쟁 방식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가 투항주의자이고 개량주의자 내지 일제 통치 협조자여서가 아니다. 이승만이 무장투쟁이나 의거와 같은 유혈 봉기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국 유학 시절인 1908년과 1909년에 발생한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옮겨본다.

‘내가 하버드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았던 더함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등(이토 히로부미)을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등과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던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여름방학에 피서지로)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원영희‧최정태 편,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119~121쪽)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은 미국 내에 혐한(嫌韓)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여파로 이승만은 하버드대 대학원 담당교수로부터 면담은 물론 논문심사까지 거절당했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의거라도 미국 언론이나 시민들의 눈에는 ‘암살자는 흉악한 악당’ 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을 동원한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해 줄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세 가지와, 하지 말아야 할 일 6가지를 꼽았다. 하지 말아야 할 내용 중 여섯 번째 항목이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무기 들고 투쟁보다 국제법 공부가 더 중요

칸트의 영구평화론 제6조에 의거하여 이승만은 암살이나 테러, 파괴공작이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스티븐스 사건이 발생한 후 이승만은 의병 활동에 비판적인 글을 1905년에 창간된 재미동포단체 신문인 『공립신보』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의병 활동이 세상의 조소거리가 될까 우려된다”면서 제대로 된 군사 조련을 받지 못한 점, 조직에 체계와 규율이 없는 점, 만국공법을 알지 못해 남에게 개명한 애국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민란당으로 취급당하는 점을 들어 의병 투쟁으로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에 일본은 서양과 통상 후 외국의 선진 학문과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안으로 군사를 조련하고, 밖으로 영국 미국과의 외교에 힘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면서, 남과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학문의 숭상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기를 들고 무장투쟁을 하는 것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절절히 외친 것이다(이승만, 「남을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할 일」, 『공립신보』, 1908년 8월 12일).

그의 의병 비판은 9월 9일 『공립신보』에 기고한 「일본의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된 일이라」 라는 제하의 논설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의병이 자기 형세와 세상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용진하는 마음으로 도처에서 일어나 지방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일본이 오히려 반기는 바라고 주장했다. 공법으로 세상에 알린 뒤 군사를 보내 하나씩 무찌르면 그만이고,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차라리 일본의 보호라도 받아 편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투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문을 배워 부강문명으로 나가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승만의 글을 소개한다.

“일본이 가장 꺼리는 바 외국에 나오는 조선 학생들이라. 지금은 앞뒤길 다 막아놓고 더 나올 수도 없으나, 기왕 나온 자만 가지고라도 모든 문명한 각색 학문을 배워 자유 자치하는 법과 부강문명에 나가는 이치를 알아 일변으로 글도 짓고 말도 하여 일본의 야심을 세상에 반포하며, 일변으로 제 나라 동포를 가르치며 인도하여 장래에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는 바요,”(이승만, 「일본의 기탄하는 일이 곧 우리의 행복된 일이라」, 『공립신보』, 1908년, 9월 2일)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하여 동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는 강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의 판도는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북만주 일대, 중국에서는 산동과 화중(華中)지역 양자강 일대,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전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서양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승국이나 패전국을 가릴 것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에서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본을 억제하거나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정부가 조직한 부대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산업력이나 군사력에서 다른 서양 열강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은 해군력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올랐다. 급기야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열어 일본의 해군력 확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김원봉의 의열단이나 박용만, 노백린 등이 구상한 수백 명 규모의 빈약한 무장을 한 군대가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일 경우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한국의 독립군은 체코 군단처럼 국제적 지원이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숭고한 이상은 현실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인데, 우리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상은 원대했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용대도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점이 너무나 많다. 이 부대는 중국 정부의 정치부가 관할하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 정부가 김원봉에게 의용대를 창설하라고 하여 부대가 만들어지자 김원봉을 대장에 임명한 것이다.

중국 정부 산하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지급받았다. 이런 한계 때문에 아무리 이 부대를 미화찬양해도 국민당 정부군 산하의 지원부대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원도 약 100여 명으로 출발하여 1940년대에는 최대 314명까지 늘어났다. 무장한 군대도 아니어서 주로 포로 심문과 일본군에 대한 비라 살포 등 반전(反戰)활동이 고작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1941년에 걸쳐 이념과 투쟁 방향을 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김두봉, 최창학 등 대원의 대다수가 중공 치하의 연안으로 탈출하여 팔로군 산하로 들어갔다.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의 반대로 화북으로 가지 못하고 충칭(重慶)에 남게 되었다. 이유는 김원봉이 조직생활을 한 적도 없고, 오로지 극소수 인원을 중심으로 테러 암살 활동을 하던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마오쩌둥 산하로 떠나지 못하고 충칭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해 김학철은 “만일 김원봉이 중경을 떠났다면 수백 명의 망명객 가족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김원봉을 믿었고,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으로 이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때문에 김원봉은 이들을 버리고 혼자만 연안으로 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동료들에게 왕따 신세가 된 김원봉은 연안으로 가지 못한 일부 조선의용대를 수습하여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임시정부와 손잡고 군무부장을 맡았고,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게 된다. 광복군이 출범한 날은 1940년 9월 17일이다.

중국군이 광복군 지휘권 행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유지 운영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19일 임정은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장비·급여 및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는 것을 수락했다.

즉 광복군의 활동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지휘권을 중국군 참모총장에게 넘긴 것이다. 그 결과 광복군 지휘부의 모든 요직은 중국군 장교에게 넘어갔다. 김삼웅은 광복군의 상황에 대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비록 중국군의 명령과 지휘감독을 받을지언정 일본군을 격멸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항일전에 나서는 것만이 민족적 대의(大義)였다는 것이다.

좌익·공산전체주의자들은 지금도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긴 것을 “자주권의 포기”니 뭐니 하며 극악무도한 언어를 동원하여 비판한다. 그렇다면 의아한 것이 있다.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긴 것은 민족적 대의라고 미화찬양하면서, 6·25 남침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위임한 이승만의 행위가 그토록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채호가 ‘의열단 선언’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양병 10만도 환상의 목표에 불과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초 일본은 중국대륙, 태평양에서 미국·중국·영국 등 연합국과 싸우느라 720만 대군과 항공모함·전함·전투기·폭격기·전차 등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출범 당시 창립 1년 후 최소 3개 사단 편성을 목표로 삼았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682명이든 6820명이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대한 명목상의 통수권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작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는 고단한 처지였다.

이러한 광복군을 대통령 문재인은 국군의 뿌리이자 모체라고 선언했고, 소련공산당의 자금을 받아 의열단 활동을 했고, 중국 정부 자금을 받아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를 칭송했다. 그가 참여한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언급했다. 아나키스트 테러리즘, 중국 정부 산하의 조선의용대, 광복군 통수권 및 지휘권은 중국군 보유로 점철된 존재를 ‘국군의 모태’라 한다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중국군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그 분 지금 제 정신인가?

김원봉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구와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당시 정치 정세 하에서 좌우합작의 마지막 종착역은 ‘공산화’라는 사실을 꿰뚫어본 인물은 이승만이 유일했다. 이승만은 끝까지 좌익과의 투쟁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와 함께 평양의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북한에 그대로 정착했다. 이후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6·25 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북한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노동상(한국의 노동부장관에 해당)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한국의 국회부의장에 해당) 등을 지냈다. 그는 1958년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구축 과정에서 숙청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결코 성공을 담보한 길이 아니요, 역사를 후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대척점에 서서 이승만과 반대 노선을 줄기차게 걸었고, 대한민국 건국이 아닌 북한 건국에 앞장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위험천만한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걸은 김원봉을 미화찬양할 수밖에 없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14

文 대통령의 김원봉 미화 “대한민국 역사 왜곡의 위험한 발상”

대통령의 김원봉 미화 대한민국 역사 왜곡의 위험한 발상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 중 북한에서 6·25 남침전쟁에 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김원봉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주역으로 인정할 수 있는 언급을 내놓은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 대통령은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사에서“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며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과거 의열단 등 독립운동에 참여해서 항일 운동을 했지만, 북한 설립에 절대적 기여를 했고 북한의 남파 간첩단을 직접 지휘하여 경제 혼란과 선거 방해를 기도한 인물이기에 문 대통령의 발언이 부적절 하다는 비판이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문 대통령 추념사에 대해 ”위를 의심케 하는 대통령의 추념사”라며 ”북한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바른미래당도 대변인 논평을 통해 “3·1절 기념사에선 엉뚱하게 ‘빨갱이’란 말이 친일 잔재라면서 청산을 하자고 했고, 5·18 기념사에선 ‘독재자의 후예’란 말을 끼워 넣었다”라며 “애국에 보수 진보가 없다면서 난데없이 북한의 6·25 전쟁 공훈자를 소환했다”라고 지적했다.

어마어마한間諜團逮捕(간첩단체포) 金元鳳(김원봉)이直接指揮(직접지휘) (1954년 1월 26일자 경향신문 캡쳐)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국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다.

그러나 1948년 월북한 이후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후로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지만, 1958년 김일성의 연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문 대통령의 김원봉 미화는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던 핵심인물이 단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인물 미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에 좌편향 이념을 교묘히 주입,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http://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27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름 단독 거명한 문 대통령… ‘역사의 정치화우려 나와

문 대통령이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모식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로 지목하여 파장이 예상된다. 이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김원봉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독립 유공자 서훈 문제로 논란이 불거지던 중에 나온 대통령 발언이라 일종의 정지 작업들이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라며 김원봉 이름만을 직접 거명했다.

이를 두고 역사학계는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주익종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조선의용대는 장개석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져 중국군 현역 중장이 통솔하던 부대”라면서 “만약 조선의용대에서 국군 뿌리를 찾는다면 우리 국군의 뿌리는 중국군이라는 얘기”라 대통령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1940년 광복군 창설 이전에 중국에서 활약하던 무장세력이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 이후 각기 다른 과정을 거쳐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39년에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섬서성 서안을 거점으로 하여 1940년 말 약 100여명에 달하는 부대원을 확보한 상태에서 1941년 임시정부의 포섭으로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의 요구로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여 1938년 10월 10일 결성된 무장세력으로 장개석의 중국군에 배속된 부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장개석의 중국 군사위원회도 모르게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북지역으로 넘어갔고 중경에 있던 대본부에는 김원봉을 포함한 20명 남짓의 간부들만 남게 되었다. 장개석 정부는 자신들이 지원한 무장세력이 중국공산당으로 가버린 사실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아 임시정부 광복군과 남은 조선의용대를 1942년 5월 통합시키게 된다.

이에 대해 주 전 실장은 “김원봉은 1941년 임정 합류를 시도하면서도 중국정부에 광복군을 승인하지 말라고 계속 요청한 인물이다. 김원봉이 광복군에 합류한 게 아니라 중국 정부가 편입시킨 것”이라 부연했다. 끝까지 김원봉은 통합과정에서 임시정부 몰래 ‘이중플레이’를 하며 중국정부의 지원을 독점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부사령직을 증설해 이 직책에 김원봉을 앉히며 임시정부 주도의 통합을 이뤄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김원봉이 애초부터 자의로 광복군에 조선의용대 전체 병력을 데리고 통합시킨 것처럼 묘사했다. 실상은 중국공산당의 주은래 등이 거부한 김원봉이 중공군에게 자신의 부대 전체를 넘긴 뒤 남은 일부 간부들만 데리고 임시정부에 몸값 높여 합류한 것이다.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지에 “김원봉이 김일성과 달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현 정권이 독립 유공자 서훈 시도를 강행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 전범으로 전쟁 직후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대한민국 대통령이 따로 챙기는 것은 문제”라 지적했다.

2015년과 2016년 각각 흥행한 영화 <암살>과 <밀정>의 주요 모티브가 김원봉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특정 정치세력에서 끊임없는 ‘역사의 정치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학계와 사회 전반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