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세계교회협의회)의 정체…WCC는 왜 우리에게 맞지 않는가: 그 기원과 신학

WCC는 왜 우리에게 맞지 않는가: 그 기원과 신학

1. WCC의 기원

개신교 선교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로마가톨릭이 예수회 중심으로 16세기부터 오지를 공략한 것에 비하면 3세기 정도 격차가 벌어지다, 19세기에 본격화되었다. 1986년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킨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미션>도, 2016년 개봉한 영화 <사일런스(엔도 슈카쿠 원작)>도, 다 가톨릭 예수회의 선교를 다룬 영화다.

개신교 선교가 늦은 이유는 가톨릭이 일찍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과 교황의 후원으로 선교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바로 그 시기 개신교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내부 투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선교를 자극할 만한 중심 기관도 부재했으며, 제후들도 선교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세례파 등 극단적인 종말론 공동체들만이 외곽으로 동선을 그려나갔다.

개신교 선교의 가시적인 성공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부터로 보는 것이 선교신학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 시기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선교 대회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기획되었다. 1,200명 정도가 모이면서 이 기획이 흥행에 성공한다. 1910년의 일이다.

많은 사람이 WCC의 기원을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결성된 기독교 연합 운동 단체’로 알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WCC의 기원은 이 시기부터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100주년 선교 대회를 기획한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가 WCC에 개신교를 합류시키는 산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WCC란 어떤 교단이나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포럼(Forum)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럼을 의미상 ‘교회(체)’로 규정하는 것이 선교신학의 중요한 특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대회의 성격이 실질적으로 무엇인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관광을 겸해 단기 선교나 순회 부흥회들을 다녀오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선교 현장은 생존과 선교의 투쟁 현장이다. 생존과도 싸우고 선교와도 싸운다는 뜻이 아니라, 생존이 선교와 싸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원이 소중하다.

안방에서 편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신앙 교리가 말초 신경처럼 발달해 있지만, 선교 현장에서는 헐거워진다. 왜? 자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하던 대로 무슨 파냐 무슨 파냐 따지다간, 고립되기 십상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현장 투쟁을 영웅열전 감상하듯 하지만, 그들의 가족, 특히 배우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윌리엄 캐리 역시 아들을 잃었고, 배우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극한을 겪었다.

이 같은 극한 현장 속에서의 연대 의식을 실제 활동으로 끌고 나온 것이 바로 존 모트였고, 그 첫 번째 결실이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컨퍼런스였던 것이다. 그가 WCC의 형성 단계까지 이를 끌고 나갔다.

2. WCC의 형성

에딘버러에서 흥행에 성공한 10년 뒤 람베스에서 한 번 더 모이고, 여기서 세 덩어리의 굵직한 대회로 파생된다. 선교 분과의 ‘국제선교회(1921년)’, 생활과 비지니스 분과의 ‘스톡홀름(1925년)’, 신앙이나 직제를 주로 다룬 ‘로잔(1927년)’…, 이렇게 3개 덩어리로 나뉠 수 있었던 람베스 회의는 ‘성공회’ 주도 모임이었다. 개신교는 1910년이 처음이지만, 이는 18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모여 온 10년례 회의와 교차한다.

이것이 무르익어, 당초 1910년 에딘버러 컨퍼런스를 주도했던 존 모트가 창설한 IMC(International Missional Council)에서는 ‘반(反)인종차별주의’, ‘반(反)세속주의’ 등 보다 거시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전방위 선교 그룹의 참여를 자극했다. 그러다 1938년 탐바람(Tarmbaram)에서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라는 구호로 전환함으로써 장차 일어날 혼성 WCC를 점점 구체화해 갔다.

여기서 ‘비기독교 세계’라는 표제가 언급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가 식민지 및 교역 정책과 혼재한 것처럼, 20세기 선교 현장 역시 여러 복잡 미묘한 ‘선교와 비선교’, ‘기독교와 비기독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의 혼재를 벗어날 수 없었다. WCC의 구상은 자기 정체성에 갇히는 소극적 선교에서 벗어난 적극적 선교의 한 양상이었던 것이다.

존 모트의 IMC는 결국 1948년 WCC로 합류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통합이 촉진되기까지는 보다 구체적이고도 결정적 요인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약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둘째는 존 모트가 1946년에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종파는 성공회, 개신교, 동방정교회, 오리엔트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다. 많은 사람이(특히 우리나라) 로마가톨릭을 이 협의체의 설립자인 줄 알지만, 로마가톨릭은 회원 종파가 아니다. 그들은 회원이 될 수 없다. 교의적으로 가톨릭은 이미 단일한 ‘보편교회’이기 때문이다.

바티칸 공의회 후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모르지만, 가톨릭의 진정한 신학에 따르면 가톨릭은 다른 교회를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 즉 개신교를 포함한 각 종파들만 가톨릭을 여러 교회 중 하나로서 참여시킨다고 여긴다. (※1948년, 세계 44개국 147교파 대표= 351명이 참여했다.)

3. WCC의 발전

WCC의 초기의 주된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믿고 홀로 한분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 공동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교회의 친교단체다”

2) 신앙고백 정신과 에큐메니칼 정신 간 올바른 관계

3) 교회의 일치

4) 상호 이해와 관용

5) 그리스도는 몸 된 교회의 머리/ 하나

6) 인간의 무질서 타파와 하나님의 섭리 인식

7)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보편적 교회

8) 교회와 (국제)사회의 무질서 회복

이러던 것이 조금씩 톤이 달라진다.

-2차 1954년 에반스톤(미국)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며, 종말론적 승리를 희망하는 원동력은 바로 사회참여이다(이른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라고 하던 것이,

-3차 1961년 뉴델리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 여타 사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를 요하되, 해결방안은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라며 ‘일치’가 강화되더니,

-4차 1968년 웁살라에서는

‘인간화’, ‘새 인간성’, ‘해방’과 같은 이념 코드 지향을 외치다가, 1971년 구티에레즈의 명실상부 ‘해방신학’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해방신학에서의 구원은 사회구원을 의미한다. 이것이 1973년 방콕에서 명문화되면서 교리적 차이를 불문하고 (명목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교회 수용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모든 교회 수용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화끈한 주역으로 참여한 것이 바로 제7차 회의에서다. 바로 현경(유니온 신학교 교수)의 저 유명한 초혼제(招魂祭, 귀신 부르는 제사)가 그것이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한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은 이집트의 흑인 여성 하갈의 영혼이여!

예수 탄생 시 헤롯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남자 아기들의 영혼이여!

잔 다르크와 중세 시기 동안 마녀심판으로 화형에 처해진 많은 다른 여성들의 영혼이여!

십자군 전쟁 때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여!

식민주의 시대와 기독교 이방선교 시기 동안에 대량 살상된 토착민들의 영혼들이여!

홀로코스트 동안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영혼들이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광주와 천안문 광장과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매일같이 죽임을 당하는 아마존 우림의 영혼들이여!

인간의 물질과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착취를 당하는 땅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피비린내 나는 걸프전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흙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맏형 해방자 예수님의 영혼이여!”

4. WCC 신학

WCC의 핵심 의제와 신학은 에큐메니즘(통합)이다. 그러나 WCC 에큐메니즘은 ‘World Council of Church’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교회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1장은 성서의 대표적인 에큐메니즘을 표지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πληρώματος τῶν καιρῶν,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τὰ πάντα ἐν τῷ Χριστῷ…

ㅡ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나케팔라이오사스타이(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곧 ‘머리’ 됨이다. 이를 유의해 다시 옮겨보면,

“카이로스(때)의 가득참의 통일(합) 속으로…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ㅡ라는 문장이다.

에큐메니즘이라는 말은 바로 이 문장에서 통일로 번역된 어휘군 오이쿠메네(οἰκουμένη)에서 온 말이다. ‘집(οἰκοϛ)’ 또는 ‘거주하다(οἰκέω)’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태초에)란 말도 ‘집’에서 유래한 것임을 감안할 때, 천지창조의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로 완결된다는 의미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저 에베소서 문장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게 복속되고, 그러면 드디어 ‘οἰκονομίαν(통합/에큐메니즘)’이 된다는 문장이다.

이 통합/에큐메니즘 원리를 고(高) 기독론(high Christology)이라 분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σώμα, 소마)이 중요한데, 저 통합체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말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짓밟기도 하고 침뱉기도 하는, 그 교회.

여기까지가 성서 에큐메니즘이다.

그러면 WCC에 참여하는 개신교에게 물어 보시기 바란다. 당신들의 머리가 누구냐고. 그러면 그리스도라 답할 것이다.

그 다음은 WCC 참여 승려께 물어 보시기 바란다. 당신들의 머리는 누구냐고. “…”

이러한 불일치 때문에, 친(親) WCC 신학자는 그에 합당한 신학을 다시금 조제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 또는 ‘머리(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만 빼면, 완벽한 통합이 된다.

여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성령론’이다. 심지어는 기독론이 성령론으로 대체되었다는 황당한 발제를 WCC 펀드로 공부하신 분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정리하면 머리를 누구로 한 에큐메니즘이냐가 중요한데, 성서는 (그리스도를 빠트린) 자연보호/환경보호 에큐메니즘이나 용공 에큐메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같은 기독론은 에베소서뿐 아니라, 요한복음, 골로새서, 빌립보서, 로마서에도 모두 장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기독론은 초대교회 설립자들의 창작인가, 헬라의 문학·철학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원천적으로 구약성서 신학에 기반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야웨께서 내 주에게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여기서 ‘너’는 누구인가.

이것이 고 기독론(high Christology), 즉 성서 에큐메니즘의 진수이다.

우리 주변의 많은 기독교인이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보다 WCC라는 이름 자체에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실정인데, 우선 상기한 그들의 신학을 유의하고, 아울러 그들의 신학의 추이를 파악하면 다음 네 그룹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E. P. 샌더스 및 새 관점 파가 주창하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

2) 고토신학 및 세대주의 (예슈아/ 나자렌 포함)

3) 친 WCC 선교신학

4) 민중신학

이 신학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기독교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약으로 구약을 말하는 데 우선하는 게 아니라, 구약으로 신약을 말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E. P. 샌더스와 그 추종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고토신학은 제3성전(또는 예슈아)이라는 용어를 선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소마(σώμα)를 약화시킨다(교회를 과정체로 전락시키는 것).

이를테면 여타 친 WCC 선교신학은 예수보다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신명을 더 선호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기독론보다는 환경보호와 접목된 성령론을 더 선호하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기독론(예수)를 들고 나가면 통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를테면 민중신학(자)은 구약학을 선호한다. 구약학을 선호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구약학을 선호하면서 신약성서를 제2성서(2차 문헌/2류 문헌)라 부르는 것이 성서 에큐메니즘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신학·신앙 노선들은 진화론, 사회주의, 친동성애 이상 가는 해악인데, 그 핵심이 ‘기독론(특히 고기독론 high Christology)’을 해체하는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중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도 공통점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 예수”, “주여, 주여” 하는 열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와 잘 맞지 않는다.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정체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맨 처음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할 때는 기독교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교파를 초월하고 교회들이 연합하여 교회의 일치를 이룬다는 정신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숨겨져 있던 베일이 하나씩 벗겨졌다. 일차적으로는 기독교 교파간의 담을 헐어버리고 교회들이 연합하였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는 종교간의 담을 헐고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기독교 통합 운동을 넘어서서 제 종교 단일화 운동(Inter-Faith Movement)의 방향으로 분명하게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는 로마 카톨릭과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종교 통합 운동을 양면에서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연합운동과 종교 통일 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독교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이 희석되면서 바른 교리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성경은 성도들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4:3)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령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을 참으로 믿고 깨달은 성도들 사이에만 가능하다. 만일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한다면 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성경은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고후6:14-16).

하지만 지금 세계 교회 협의회는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우신 교회와 사탄의 우상을 일치시키면서 하나(One Unity)가 되자고 주장한다. WCC가 시작된 이후 일어난 다음의 사실들을 보면 세계 교회 협의회가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 통합운동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훼파하는 인본주의 연합운동이며 하나님께 엄중한 심판을 받을 무서운 운동이다. 현재 WCC가 역사 속에서 등장하고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이러한 기독교 통합 운동을 용인하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상황이 사도 바울이 경고한 종말의 배도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제1차 WCC총회: 1948년 암스텔담 (Amsterdam, Netherlands)

WCC가 그들의 강령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들의 목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끔 한 믿음과 한 성찬으로 교제하는 통일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교회를 건설할 목표로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에서 44개국, 147개 교회의 대표자들 351명이 모이면서 창설되어 제1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제 1 차 총회에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무질서한 인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면서 ‘국제난민국제기구’를 발족하였다.

제2차 WCC총회: 1954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Evanston, IL, USA)

제 2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Christ the Hope of the World)’이란 주제로 열렸으며 161개 교단이 가입하였고 해당 교파와 교단에서 502명이 참석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퇴치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건설이 WCC의 지상목표”라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스탈린의 평화 공존 결의안을 지지하였고, 대한민국은 이때 가입 신청을 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갈라지기 시작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때 기장, 기감, 예장(통합)은 KNCC(National Council of Church in Korea)의 이름으로 WCC에 가입하였다.

제3차 WCC총회: 1961년 뉴델리 (New Delhi, India)

제3차 총회에서 매우 위험스러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제3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Jesus Christ –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하여 그리스도가 주제의 중심이었는데 루터란 신학자 죠셉 시틀러(Joseph Sittler)가 총회에서 연설한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WCC의 신앙에 그릇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틀러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교리는 우주의 교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구속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구속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주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무대이고 우주와 모든 자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 보살피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나온 것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란 개념이다. 그 개념에 의하면 “우주적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보편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창조의 중보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관계 없이 그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이다(David Wells). 그러므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에도 임재하시는데, 다만 그들이 잘못 알고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 대신에 크리슈나(Krishna)를 구세주로 믿으며, 불교에서는 부처(Buddha), 모슬렘에서는 마디(Imam Mahdi)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또한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으로 불교 신자, 힌두교 신자, 모슬렘 신자 모두가 “익명의 크리스챤(anonymous Christian)”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서 타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기독교인이 되는 일이 없이도 상호간의 일치와 연합을 시도하는 거짓된 신학이 태동하고 말았다.

제 3차 총회에서부터 WCC는 “다른 종교 안에도 그리스도가 관념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는 모든 창조물과 전 인류를 포용한다(The reconciliation wrought through Christ embraces all creation and the whole of mankind)”(Yri, Quest, p.169)라는 WWC의 “Witness Section”의 수록된 내용이 이 무서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WCC가 다른 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구원하는데 힘쓰고 있지 않고 장차 지옥에 빠질 다른 종교인들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복음의 변질을 초래하는 그릇된 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초 칼 라너로부터 시작된 카톨릭의 타 종교에 대한 비 성경적인 신학과 사상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다가 드디어 지난 2005년 11월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불신자도 역시 구원 받는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바티칸 뉴스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WCC의 종교 통합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NONBELIEVERS TOO CAN BE SAVED, SAYS POPE” (VATICAN CITY, NOV. 30, 2005, Zenit.org – Whoever seeks peace and the good of the community with a pure conscience, and keeps alive the desire for the transcendent, will be saved even if he lacks biblical faith, says Benedict XVI ) (누구든지 순전한 양심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선을 추구하며, 초월적인 것을 위하여 그 소원을 활기있게 유지하면, 성경적 신앙이 부족하더라도 구원받을 것이다 – 교황 베네딕트 16세 발언)

WCC는 종교통합을 위해서 만인구원설을 주장하였고 로마 카톨릭 역시 WCC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만인구원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두 조직은 같은 뜻을 가지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가까이 하고 있다.

제4차 WCC총회: 1968년 스웨덴 읍살라 (Uppsala, Sweden)

WCC는 1968년 제4차 총회에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Behold, I make all things new)”는 주제로 모였다. 모임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종교의 어두움 속에서 주무시는 그리스도를 깨우기 위하여(to awaken Christ who sleeps in the night of all religions of the world)”라고 발표하였다(Spence). WCC는 제 4차 총회에서 “현존하는 다른 믿음의 사람들과의 대화프로그램(Program of Dialogue with People of other Living Faiths)”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타 종교들과의 대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부터는 “크리스챤(Christian)”이란 용어를 “신자(believer)”라는 말로 바꾸기로 하였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동료 신자들(fellow believers)” 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러한 용어 변화는 WCC가 다른 종교를 향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그릇된 사상이 유입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부터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현존하는 (다른) 신앙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DFI: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 and Ideologies)”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였고, 1973년 방콕에서 모인 여러 종교간의 대화의 장에서는 세계불교협회 회장이 중심인물이 되었다.

제5차 WCC총회: 1975 나이로비 (Nairobi, Kenya)

1971년부터 시작한 타종교와의 대화프로그램인 DFI의 열매가 1975년 제5차 총회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WCC 총회에 이슬람교, 로마 카톨릭, 불교, 힌두교, 유대교, 무신론자 등 각종 이방종교의 대표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6차 WCC총회: 1983 뱅쿠버 (Vancouver, Canada)

제6차 WCC 총회에서는 개회식 때 카나다 원주민(Red Indian: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행사도 곁들였다. WCC는 인디언의 종교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우상인 토템기둥(totem pole)을 총회장소에 세웠고(JS Malan), 개회식 때 그들의 종교주문을 암송하며 북과 노래와 춤에 맞추어 그들의 정결의식도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WCC 총회역사상 최초로 무신론자(theological atheist)를 초청하여 총회에서 멧세지를 전하게 하였다.

WCC의 “종교간 대화프로그램(Interfaith Dialogue Program)의 의장인 뮬더(Dirk Mulder)는 카나다 원주민에 관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들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버림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기자는 “그렇다면 불교신자나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뮬더는 “그럼은요, 그렇구 말구요! (Sure, sure!)”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WCC 지도자들 역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제7차 WCC총회: 1991 캔버라 (Canberra, Australia)

호주 캔버라에서 모인 제7차 WCC총회는 그 주제가 “오소서, 성령이여! 모든 창조를 새롭게 하소서!(Come, Holy Spirit – Renew the whole creation)”였는데 이방 종교를 본격적으로 포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4,000여명의 참가자 가운데에는 점술가, 심령술사, 마술사, 무당 등의 세계 15개 종교 대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회식에서는 호주 원주민의 전통종교의식을 진행되었다. 호주 원주민 마법사들(Witchdoctors)이 젖은 고무나무 잎새를 태우면서 짙은 검은 연기를 하늘로 올리고 참가자들은 조상들의 영들로부터 축복받기 위하여 그 연기 사이로 걸으라고 요청받기도 했다(JS Malan).

이때 한국의 여성 신학자 정현경 교수(teaches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는 주제 강연에서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창호지에 쓴 초혼문을 가지고 나와서 낭독하며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고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 . 다윗 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우리야의 영이여 오소서 . . . . 나치에 죽음 당한 영이여, 2차 대전 중 창녀로 끌려간 한국 여인의 영이여,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은 우리의 형제 예수의 영이여 오소서 . . .” 라고 읽은 다음 그 종이를 불에 태워 공중에 날렸다.

제8차 WCC총회: 1998 하라레 (Harare, Zimbabwe)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제8차 WCC총회는 그 주제가 “하나님을 바라라. – 소망 가운데 기뻐하라(Turn to God – Rejoice in Hope)”이었다. 이 총회의 특징은 WCC 가 창설 된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 아프리카와 결속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총회에서는 처음부터 WCC와 함께 하던 동방 정교회의 여러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특별 담당부서(Special Commission)를 창설하였다. 이는 WCC의 회원 교회의 지경이 크게 넓혀진 것을 의미한다.

제 8차 WCC 총회에 참석한 한국의 정현경 교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14:6의 내용으로 “그리스도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실수한 것입니다(Jesus was mistaken)”라고 말하였다(Ralph G. Colas).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날 WCC의 종교간의 연합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 9차 WCC총회: 2006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 Brazil)

제 9차 WCC 총회의 주제는 “당신의 은혜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었고, WCC 역사상 가장 많은 기관과 단체들이 모인 총회였다. 전 세계적으로 4천의 단체와 348개의 회원 교파가 참여하였다. 제 9차 총회에서는 “하나의 교회로 부르심”에 동의하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통합된 세계 교회 및 세례와 기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WCC의 모든 결정은 다수에 의하기로 결정하고 이 결정에 따라 WCC의 회원 자격이 대폭 수정되었다. 특히30세 이하의 젊은 층들을 대거 영입하기로 하였다.

제10차 WCC총회: 2013년 부산(Busan, South Korea)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세계교회협의회(WCC: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노선은 상대주의, 혼합주의, 그리고 인본주의에 기초한 통합운동(Ecumenical Movement)임이 분명하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집어 던지는 배교 그 자체이다. 우리 WCC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사실을 모든 교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http://www.christiantoday.us/19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