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고 쓰고 ‘정치’라고 읽는다…영화 된 정체성 정치…무한혐오와 배척의 시대로

‘문화’라고 쓰고 ‘정치’라고 읽는다…영화 된 정체성 정치…무한혐오와 배척의 시대로

진영화 된 정체성 정치…무한혐오와 배척의 시대로

문화 다양성의 정치적 배분은 애당초 불가능한 목표

전장이 되어버린 문화는 더 이상 문화일 수 없다

집단정체성 유지와 확산을 위한 투쟁은 혐오와 배척으로 이어져

선거 앞둔 정치적 내전 시기…파국의 위험 예감케 해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1. 현실, 갈라진 문화 진영의 사회

21세기 초에 세계화를 평평한 세계라고 설명한 주장이 있었지만 개방된 세계는 정체성 혼란과 갈등으로 얼룩진 주름잡힌 세계다. 고립과 독립을 주장하는 폐쇄적인 문화 집단이 만개한 세상이다. 다원주의의 전개는 사회를 세분된 집단으로 나누어서 문화적 다양성의 지형을 만든다. 놀이를 문화의 본질로 보고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을 설명한 호이징가의 주장이 생각나는 것은 놀이야 말로 문화현상과 사회적 유대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함께 향유하는 놀이 현상은 고대의 아레나에서부터 근대의 관람 및 체육 시설까지 이어지는 놀이 공간과 네트워크상의 게임 등 콘텐츠 세상에서 확인된다.

즐거움의 공유와 이것이 형성한 유대가 보편 가치를 상실한 시대에 서로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된다. 도시화가 확산되고 이주의 자유와 민주정의 진전으로 자유롭게 풍요로운 문화를 공유하는 환경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쉽게 소통하는 현상의 결과다. 동일한 문화 상품이 국경을 넘어서 서로를 연결하고 감성을 공유하며 문화를 함께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넷플릭스와 디즈니를 통해서 유통되는 영화나 케이팝은 전세계인이 공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취향의 공감적 유대의 집단이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은 자기 집단만의 문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음악이나 영화 감상, 지식이나 정치적 의견의 교류, 종교적 가르침의 공유에서 시작하는 공감의 공유가 내면의 정체성을 일깨우며, 그들만의 고유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확고화하면서 집단의 관점과 태도로 세상에 대응하는 문화 정체성 집단이 된다. 네크워크 사회에서 선호에 따른 연결이 만드는 필터버블 현상은 문화적 집단 정체성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정보 편향이 지속되면서 집단은 세상이나 다른 집단과는 구분되는 특성을 갖게 되고 긴장 관계를 야기한다.

2. 문화정치

문화는 집단의 유지와 확장이라는 활동의 중요한 수단이다. 문화 집단이 자신의 독자적 성향과 방향성을 가지고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와 투쟁할 때에 그 문화는 정치 수단이 된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산시키는 교육과 선전은 문화의 형태로 전파된다. 미학은 정치 철학을 대체하고 예술은 동일성의 기준을 내세우는 광고가 되며 문화는 선동의 방법이 된다. 문화정치는 공통의 감정을 만들고 이성을 장악하며 행동을 제어한다. 혐오하거나 좋아하기 위해서 기억하고 학습하는 과정과 실천으로서의 대립을 통해서 집단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문화정치에서 문화는 정치적 수단이다. 최근 중국의 공자학원은 타문화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과거 중국 문화대혁명은 대내적인 문화정치 현상이다. 모택동의 권력투쟁의 수단이었던 문화대혁명기 수난사를 중국 지식인 계선림은 10년대재앙이라고 불렀는데, 외적인 것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질서를 파괴하는 지독한 재앙이었기에 적절한 표현이다. 집단 정체성을 보존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현실을 가리고 선전 선동과 억압으로 차이를 부정하며 변화를 거절하면서 외부의 현실과 맞서서 모두를 집단의 정체성 안으로 몰아넣는 것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폭력이며 모두에게 재앙이다.

3. 문화권력

문화의 정치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힘의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권력은 대립되는 것과의 대결로 행사되므로 대결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선한 일을 한다는 신념을 기초로 하여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의 장으로 만들어 적과 동지의 구분이 설정된다. 선악의 구도화를 위해서 윤리나 종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경우에도 모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익숙한 문화 환경을 근거로 하여서, 익숙한 것은 선하고 낯선 것은 악하다는 구분법을 만들어서 다툼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의 기획은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근대는 종교적, 관념적, 추상적인 권리를 구체적인 권리로 전환하고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창설하였다. 권리는 확장되고 세분화되면서 권리로서 확보된 지위는 힘이 된다. 문화 다양성은 문화 정체성을 권리화한다. 국가는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문화국가를 표방하면서 고유한 국가 정체성을 개발하고자 하지만 다원주의의 진전에 따라 국경내의 다양한 정체성의 분화는 통합을 어렵게 하고 국가는 세분화된 문화정체성 집단의 연합체가 된다. 지역 기반의 집단이더라도 오늘날의 지역성은 문화에 의해서 표방된다.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고자 하는 문화복지라는 형태의 시도는 문화권리화의 최종적인 형태다.

4. 문화전쟁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문화정체성을 확고한 권리로 주장하면서 문화집단은 권력이 된다. 문화 집단이 문화 정체성 보전과 확장으로 나아갈 때, 문화집단간의 권리와 의무의 조정이 어려워진 상황은 힘의 대결로 이어진다. 문화 연합의 국가내에서 문화 진영간의 대립관계는 중세 유럽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국경내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의 범람은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동력이 된다. 다양성은 풍요의 시대의 산물인데 풍요의 시대의 끝에는 전쟁 발발의 위기가 도래한다.

집단 정체성의 유지와 확산을 위한 투쟁은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대립의 장치로서 혐오와 배척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정치학은 옳음과 좋음을 구분하였지만 좋음이 옳음과 일치되는 시대에 정치는 좋고 나쁨이라는 편견의 보존이고, 자기만의 태도를 간직하려는 게으름이며, 자기 주장을 강요하는 억지이고, 다른 것과의 교류로 인한 변화를 거부하려는 고집이다. 다양성의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답고 그럴듯하게 보여지더라도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대립 상황의 지속은 바깥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고립으로서 변화의 물결을 따르지 못하면서 타인의 변화까지 저지한다.

진영화된 문화권력간의 투쟁인 문화전쟁은 문화 정체성의 대결이다. 문화 전쟁에서 문화는 프로파간다가 된다. 문화는 더 이상 교류가 아니며 설득과 양해와 화합은 없는 일방적인 선포다. 문화를 정치가 지배하고 관리할 때, 정치는 문화에 흡수되어서 소멸된다. 집단 정체성을 내세워 다른 문화와의 충돌로 인하여 공화국의 단일성과 독자성은 위기에 처한다. 정체성 집단간의 문화 전쟁의 상황에서 내일의 문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전장이 되어버린 문화는 더 이상 문화일 수 없다.

5. 다양성은 어떻게 평등 및 자유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민주정은 문화다양성의 확대와 권리화로 말미암아서 증가하는 문화정체성 집단에 의한 정체성정치의 확산으로 정체성 혼란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다시 권리 이전의 문화, 정치 이전의 문화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민주정의 현재의 질서체제로는 세계화된 도시안의 문화 집단 간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한 문화충돌과 문화전쟁을 대처하기 어렵다.

확장된 권리로 인한 의무의 확장 및 증대로 인하여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기 어렵다. 증대하는 의무로 인한 자율성의 제약과 권리 간의 충돌로 인한 자유에 대한 제한이 증가할 수 밖에는 없고 결국은 평등이라는 균형의 달성이 어렵다. 문화 정체성의 투쟁 상황은 재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복지 문제 이상의 난제 중 난제다. 문화 다양성의 정치적 배분은 애당초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었을까? 공존을 이룰 것이라는 공화국의 제도적 틀이라는 것은 근대가 만든 가치 체계와 함께 근대의 꿈이 아니었을까?

문화전쟁의 시대는 겪어야만 하는 변화의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을 단위로 생각하는 다양성과 국가 이상의 단위에서 도출되는 평등과 자유의 요구는 서로 충돌하여 해결방법이 보이는 않는 상황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두려움의 원인인 위험을 예견하게 된다. 정체성 정치가 만연한 시대에서 민주정의 지배층인 선거귀족은 오히려 그러한 혼란을 근거로 지위를 유지하는지 모르겠다. 파시스트에 의한 권력장악의 역사적 경험은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이 항시 겪게되는 두려움의 실체다.

정치가 모든 것이 아니며 유일한 해결방법이 아니고, 모든 것의 권리화가 권리로 인해서 궁극적인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문화 정체성이 정치 문제로서 해결해야만 하는 우리의 본질적인 과제가 아닐 수 있다. 자기 단위에서 권력을 내려놓거나 비정치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방법일까? 호이징가의 설명으로 돌아가서 문화를 놀이로 본다면 이러한 생각도 가능하겠다. 영구적인 놀이는 없고, 놀이를 보존할 의무도 없다. 풍요한 시대에 놀이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무대의 장치는 현실과 유사한 경험을 주지만, 언제까지나 관람석에 앉아서 연극을 즐길 수는 없다. 연극은 언젠가 끝나고, 현실은 찾아온다. 순수한 유대관계만을 남겨두고 우리의 공간을 비워진 상태로 남겨둘 수는 없을까?

민주정의 승리 이후 기대에 찬 21세기의 평평한 세상의 꿈은 오히려 주름진 세계의 재발견이라는 현실을 맞이하였다. 어쩌면 근대의 꿈에 가려져 있었던 세상의 본래적 모습을 확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화를 약속하는 선거를 앞둔 시기에 오로지 자기 집단의 정파적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비방으로 일관하는 정치 상황은 파국의 위험을 예감하게 한다. 극한 대결로 달려가는 정치적 내전의 시기를 살면서 언젠가는 끝날 연극에 취하지 말고 냉정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계속하여 질문을 던져야 하겠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前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변호사)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50359

문화라는 이름의 정치

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문화권력의 본질을 탐구했다. 아비투스(habitus)란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성향,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체계를 의미한다. 집단 내에 존재하는 동질적 특정과 집단 간에 존재하는 배타적 이질성으로 계급 구성원들의 문화적 행동 특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지식인과 예술인의 성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장(場)에서 계급적으로 형성된다. 그에게 사회란 구조물이 아니라 개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망이고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지식인과 예술인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바처럼 ‘호명(呼名)’된다.

이렇듯 한 문화예술인의 저작은 그 사회의 장(場) 안에서 결정된다. 지식사회학적 접근 방식에 의하면 순수한 개인의 창작물이란 없으며 창작자의 의식은 그가 속한 여러 중층적 장들에 의한 반영물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문화의 다양성은 결국 사회적 이념과 가치 간에 충돌 점으로부터 운동성을 가진 헤게모니를 위해 경쟁하는 양상을 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좌파 지식인인 부르디외의 논지와 알튀세르의 호명론을 우파가 수용할 수 있다면 문화는 곧 정치성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정치성이란 다양성을 하나의 기획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질성들 간에 대립관계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문화적 다양성을 굳이 하나의 기획으로 만들려는 정치성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게 되는 데는 그 사회가 놓여 있는 ‘구체적 현실’ 때문이다. 한 사회의 현실은 개인들이 갖는 목적과 처지의 개선 욕구로 인해 동력을 갖고 변화하려 든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문화인들 중에는 독립과 해방을 꿈꿨던 이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지의 차원에서 그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민족주의 예술문화를 지향했다.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thing)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질서’로 파악했다. 이때 적(Enemy)이란 타자로서의 이질성을 띠는 약한 갈등으로부터 무력으로 대결해야 하는 극단적인 적대성까지를 포함한다.

‘문화전쟁’이란 바로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문화전쟁은 곧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가치 투쟁의 양상이기도 하다. 문화계 종사자라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문화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이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렇다’라는 존재론적인 문제다. 따라서 문화가 갖는 정치성으로부터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결과적 현실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것(Good)인가’라는 판단이다.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를 위해 “ ‘올림푸스의 신들이 방탕하다’거나, ‘전쟁에 나선 장군들이 인간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시인들의 시구절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에서도 제기된다.

현명한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의 불경한 시를 검열하고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가 파시스트여서가 아니라 아테네가 처한 구체적 현실 때문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였다.

오늘날 ‘군대내 동성애 합법화’가 문화전쟁의 한 전선(戰線)이라면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논쟁의 논거들의 옳고 그름보다는 군대내 동성애 합법화라는 결과가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옳은 것(Right)이 반드시 그 결과로서도 ‘좋은 것(Good)’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은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 결코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현실을 목적에 맞게 규정하려는 제 정파들 간에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일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화의 정치성을 탈이념적, 탈정치적으로 추구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결국 헤게모니를 향한 문화권력 의지를 가진 집단에 대항하지 못한다. 그 방법론은 집단, 계급, 젠더, 민족, 생태와 같은 허구적, 전체주의적 문화운동에 맞서서 개인과 자유의 미학, 그리고 인문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문화전쟁을 보는 4개의 시선

종북의 586운동권이 시작한 문화전쟁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원조(元祖) 안토니오 그람시가 1920년대에 ‘문화전쟁(culture war)’론을 설파한 이래 청소년교육, 대학강단, 대중문화, 대중매체를 장악하려는 좌파 변혁운동가들의 전술은 짭짤한 재미를 보아왔다.

한국의 NL(민족해방파)과 PD(계급해방파)도 80년대 이래 현대사교육 분야, 학술계, 대중 연예계, 문화이론 분야, 미디어, 종교계 등 각 분야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둘러 왔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다만, 안토니오 그람시는 철학에서 볼셰비키 레닌과 달랐지만, 한국의 NL PD는 철학에서는 아류 레닌 아류 모택동, 수단방법만 그람시일 뿐이다.

후진국에서는 폭력혁명으로 권력을 먼저 탈취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세뇌하고 교양하고 사상 개조를 한다. 레닌과 모택동이 그랬다. 그러나 그람시의 선진국 혁명론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먼저 물들인 다음에 세상을 거머쥐자는 전술을 제시한다.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어떤 콘텐츠에서 어떤 콘텐츠로 바꾸는가? 오늘날에는 세계화 반대 등 사회주의적인 정치경제론 말고도, 동성애 옹호, 가부장제(家父長制) 부수기, 좌파적 페미니즘, 병역거부, 좌파적 반전(反戰) 의식, 환경 근본주의, 위계질서 허물기…같은 사회문화적인 코드들이 흔히 등장한다. 문화적인 의미의 전통주의(traditionalism) 대(對) 세속적 진보주의(secular progressivism)의 싸움인 셈이다.

청소년들과 20~30대가 딱히 무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좌(左)로 휩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우상파괴적인 대들기와 허물기의 필(feel)이 그들의 머리와 마음에 쏙쏙 꽂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파 문화혁명 ‘일꾼’들은 전통사회의 해묵은 인식체계와 관행들을 영화와 연극과 소설과 역사교과서와 대중매체와 서점(書店), 그리고 종교집회의 강론대(講論臺)를 통해 씹고 비꼬고 풍자하고 폄하하고 모욕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특히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문화축제’라는 이름의 광란 굿판을 통해서 말이다. 한때 민노당 학생위원회 출신 해사(海士) 교관이 대한민국 국군 예비장교들의 머리와 마음을 바꾸기 위해 그런 짓을 하다가 기소되었다.

어떤 EBS 강사는 고교 수험생들의 역사인식을 좌향좌 시키기 위해 TV에서 마구 떠들어댔다. 이름을 예거하기가 힘들 정도의 수많은 영화계, 연예계 종사자들이 민노당 지지를 선언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족히 그람시식의 문화전쟁이라 할 만하다.

역사 해석에서 벌어지는 문화전쟁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들은 대개 역사 다시 쓰기에서 시작한다. 첫 단계는 역사 다시 말하기다.’

얼마 전 한 이스라엘 역사학자가 한 말인데 사실 별로 신선할 것도 없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그람시는 문화, 역사 헤게모니 전쟁을 이야기했으며 모든 변혁 운동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를 들쑤셔 그들의 노선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분칠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우라면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가 대표적인 역사 다시 쓰기다. 그 결과 자유인의 자랑스러운 나라 대한민국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에 친일과 독재와 친미 정권이 들어 앉았다.

이 역사 다시 쓰기는 역사의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 다시 쓰기는 문화에서 펼쳐진다. 문화에서 구현된 다시 쓴 역사는 나중에 오히려 역사를 압도하며 대중들에게 사실처럼 각인된다.

‘태백산맥’은 그 탁월한 성과다. 이 전대미문의 가짜, 위조, 조작 소설은 해방공간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꿔놓았다.

역사 다시 쓰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발굴하기다. 여러 성공 사례가 있지만 좀 덜 알려진 이야기를 하자면 ‘광해군의 재해석’이다. 광해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복권이 안 된 인물이다.

노산군이 단종이 되고 사육신과 김종서가 신원, 복권이 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폭군의 지위를 지켰다. 이 광해를 무덤에서 끌어내 띄운 인물이 있다. 한국인 아니다. 일본의 어용학자인 이나바 이와키치다.

다시 쓴 역사는 그러나 아직은 날 것이다. 해서 여기에 당의정을 입혀야 하는데 그게 바로 문화예술이다. 아무도 천안함에 대한 1000쪽 짜리 보고서를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한 시간 반 동안 영상으로 그 사건을 ‘보고’ 싶어 한다.

진보가 문화예술에 목을 매는 이유다. 일찍이 레닌은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간파했으며 제3 제국은 아리안 족의 탁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를 선택했다. 그럼 보수우파도 되지 않느냐고? 이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

보수우파는 성취를 덕목으로 가지며 항전이나 항쟁은 좌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예술의 본질을 알면 금방 이해가 가능하다.

문화예술은 너무 방대하니 대표적인 매체인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를 내 식으로 정의하자면 ‘불가능한, 힘든 일에 도전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영화 ‘록키’는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채권추심업자와 막강 세계 챔피언의 대결이다. 누구를 응원하겠는가.

당연히 채권추심업자 청년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약한 것이 강한 것과 싸울 때 우리는 약한 것의 편을 들며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에 감동한다. 인간의 거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강자가 아닌 까닭이다.

선거용 기획영화를 만들어 온 ‘진보’

대중문화는 국민의 사고와 행동에 더 강한 영향을 준다. 대중문화는 문화전쟁의 최대 격전지다. 특히 스타가 주도하면 그 파장력과 파괴력의 최대치는 핵폭탄의 위력에 맞먹는다. 문화전쟁이 무서운 이유다.

세월호는 기억하지만 ‘서해수호의 날’은 잊고 있는 미래 세대들이 있다. 심지어 연평해전을 픽션 영화로 알고 있는 대학생들도 있다. 김일성 찬양가인 ‘충성의 노래’를 만든 윤민석의 노래 ‘이게 나라냐 ㅅㅂ’을 부르는 어린이도 있다.

‘화려한 휴가’, ‘광해, 왕이 된 남자’, ‘26년’, ‘남영동1985’, ‘지슬’, ‘더킹’, ‘공조’, ‘눈길’, ‘보통사람’, ‘특별시민’, ‘1987’, ‘임을 위한 행진곡’, ‘택시운전사’, ‘대장 김창수’처럼 대선 시즌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선거용 기획 영화들도 있다.

‘세월엑스’처럼 ‘괴물체 충돌설’을 제기한 네티즌 자로의 다큐멘터리와 ‘인텐션’처럼 세월호 고의침몰설을 선동하는 영화도 있다. ‘판도라’처럼 원자력발전소 폐지, ‘7년-그들이 없는 언론’처럼 방송법 개정, ‘자백’과 ‘메멘토모리’처럼 국정원 해체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말하게 하는 영화도 있다.

서울대의 ‘얄라성’ 같은 영화 동아리와 소규모 영화 클럽들은 “영화는 혁명을 위한 총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민중영화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권 학생의 고민을 그린 ‘인재를 위하여’(1987, 장윤현 연출), 광주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미국을 규탄하는 내용의 ‘오! 꿈의 나라’(1989, 이은, 장동홍, 장윤현 연출), 노동자들의 파업을 그린 ‘파업전야’(1990, 이은, 장동홍, 장윤현, 이재구 연출), ‘어머니, 당신의 아들’(1991, 이상인 연출) 등이 대표적인 민중영화 작품들이다.

이태(본명 이우태)의 자전적 소설 ‘남부군’(1988)은 빨치산을 미화한 작품이다. 1990년 정지영 감독이 영화화했다.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1989년)을 통해 청년들이 대한민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주사파(主思派)의 교과서였던 이 소설은 1994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했다. 문화안보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개인이 문화안보의 주체라는 생각으로 무너진 나라의 기본을 다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출판계는‘가치투쟁’ 중

미국에서는 보통 대선이 있는 해에 좋은 정치사회 분야 책들이 많이 출간된다. 특히 올해는 리버럴 민주당의 더 심각해지는 좌편향과 극좌성향 의원들의 주도권 행사, 그리고 인종갈등의 과격화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문명적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보수주의자들과 출판사들은 서둘러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

사실 지난 수년 동안 ‘리버럴’의 진보세력들이 비판이론이나 ‘정체성정치’ 등을 통해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구기독교 전통과 문명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반세기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치른 문화전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일찍이 이 ‘진보’ 역사의 흐름에 맞서 힘겨운 투쟁에 뛰어들었다. 특히 문화영역에서 큰 축을 이루는 출판시장은 사회의 지적 흐름과 담론을 주도하고 여론의 기저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기파랑)의 저자 벤 샤피로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이 너무도 쉽게 붕괴할 수 있음을 진단한 책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젊은 보수주의자 샤피로는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에서 3500년의 서구 역사를 조사하면서 위대한 서구세계가 유대문명의 도덕과 헬라문명의 이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 있음을 풀어낸 바 있다.

<미국을 단 세 단계에 파괴하는 방법>에서 샤피로는 그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말 그대로 단 세 방에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바로 서구문명의 철학과 문화와 역사만 무너뜨리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샤피로는 극좌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미국의 이 세 기둥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분석하며 서구문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학과 문화와 역사라는 근간을 보수하고 사수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심각한 국가 위기의 상황에 대해 저명한 보수주의 사상가 로드 드레허는 ‘연성 전체주의(soft totalitaria nism)의 도래’라고 설명한다. 드레허는 탈기독교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남은 수도사적 선택을 처방한 <베네딕트 옵션>(IVP, 2019)의 저자다.

이 신간에서도 드레허는 무엇보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고된 앞날을 예고하며 이제 심각한 고난과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크리스천 반체제주의 매뉴얼’이다.

저자는 솔제니친 등 구소련 반체제인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현대 미국에서는 전체주의적 성격의 체제가 서서히 도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진보주의는 사실상 종교나 다름없는 강한 신념체계이며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의 세계관을 가장 큰 적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임을 풀어낸다.

그리고 또다시 구소련 전체주의를 견뎌낸 반체제인사들의 경험을 근거로,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가정이라는 ‘저항공동체’를 통해 고통을 감내하며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진정한 십자가의 길을 처방으로 제시한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의 가치관과 진리를 문화와 화합과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한국 교회도 엄중히 귀 기울여야 할 내용이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