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하교회 리포트 1] 다시, 죽음의 땅으로

[북한 지하교회 리포트 1] 다시, 죽음의 땅으로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 국가 북한…기독교 ‘박멸’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른 김씨 일가

기독교를 믿으면 정치범수용소에 가거나 처형을 당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다시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누구인가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 국가 북한. 김일성은 북한에서 기독교를 ‘박멸’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북한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러나 북한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이른바 ‘지하기독교인’은 4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5만~12만, 최대 20만 명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반인륜적 처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정권의 가혹한 박해와 살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정권의 삼엄한 감시체제 아래 이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켜가고 있을까. 이 보고서는 독재 권력과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영혼의 존재와 자유를 향한 갈망에 대한 기록이다.

다시, 죽음의 땅으로

2005년 겨울 북녁땅이 보이는 북중 국경의 어느 마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불었지만 박민우(가명)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북한땅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박민우의 등에는 성경책 26권이 든 가방이 메여있었다. 가방 안에는 반도체 라디오와 1:1 제자양육 지침서, 신앙서적들과 CD도 들어있었다. 북한에 돌아가 지하교회를 설립하면 내걸 생각으로 40*20 크기의 십자가도 챙겼다. 보위부에서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했던 그는 성경책을 들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발각되면 현장에서 즉결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미쳤었던 같아요. 머릿속에는 오직 북한에 들어가 교회를 세울 생각만 가득했어요.” 눈앞에 북중국경 경비초소를 지키고 있는 총 든 북한군인이 보였다. 그 군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2008년 늦가을의 어느 새벽 3시 30분.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또 다른 영혼이 있었다. 김미진(가명)은 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저 어둠 속에 그녀의 가족들이 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성경 구절을 되뇌였다. 옷 속에는 비닐로 싼 핸드폰 크기의 작은 성경책이 숨겨져 있었다. 이년 전 23살의 나이로 그녀는 저 강을 처음으로 건넜더랬다. 굶어죽어가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중국에서 식량을 좀 구해올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린 것은 인신매매단이었다. 그동안 겪은 일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다. 몇 달 후면 그녀는 그토록 바랐던 남한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북한의 가족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녀는 북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가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독교 ‘박멸’하고 스스로 신이 된 김씨 일가

1945년 분단 이전 평양과 북한지역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번성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시행된 북한당국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광범위한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인해 1970년 초 무렵 북한지역에서 기독교인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북한의 독재자 김씨 일가는 기독교를 수령 중심의 유일사상지도체계에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해 기독교인을 타도했다. 그리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부정하며 배척한다. 공산주의에서 종교는 공산혁명의 완수를 위해 제거돼야 할 대상이다. 북한당국은 해방 직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봉건시대의 낡은 잔재인 미신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이라며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 된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김일성 저작집 5 (1949.1~1950.6)).

북한정권은 해방 직후부터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국가주도의 기독교 말살 정책을 시행해왔다.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을 통해 종교단체가 소유한 토지 15,195정보를 무상으로 몰수했다. 1947년 12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화폐개혁을 시행하면서 종교계에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종교단체의 현금보유를 금지하고 은행거래를 강요하면서 인출 시 사전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북한당국은 단독정부 수립과 동시에 전쟁준비에 집중하기 위해서 매우 과격한 종교탄압 정책을 폈다(2020 북한 종교자유 백서).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의 인천상률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북한당국은 ‘교직자를 모두 살해하라’는 지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50여 명의 신부와 60여 명의 목사가 납치돼 서울 근교에서 총살당했다. 또한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는데 당시 연행됐던 대다수 사람들은 종교인들이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북한에는 20여 명의 목사와 5만 명 이하의 신자가 남아있었으나 교회 건물을 모두 파괴됐고, 반기독교적인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휴전을 전후해 북한당국은 종교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종교인과 연고만 있어도 처벌했다. 종교인 출신은 반동분자로 몰려 일반 공직에 취임할 수 없었다. 여행, 진학, 장학금 수여 등에서도 제외됐다. 종교의식은 모두 금지됐다. 북한당국의 철저한 종교탄압으로 인해 북한 내 종교단체와 종교활동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58년 5월 30일 노동당 상임위원회는 “반혁명분자와의 투쟁을 전당적, 전인민적 운동으로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해 ‘중앙당집중지도사업’을 2년에 걸쳐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의 성분을 ‘믿을 수 있는 층’과 ‘믿을 수 없는 층’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김일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할 핵심계층과 유사시의 동요계층, 적대세력으로 전환이 가능한 계층 등으로 세분화해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다. 적대계층은 집중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북한사회 전체가 집단 농장과 집단 노동체계로 엮여 더 이상 감시를 벗어나 종교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월남자 가족과 종교인들과 그 가족, 지주 출신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양강도 5호 농장과 아오지 탄광 등으로 추방됐다. 북한 각지에 정치범 수용소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김일성은 1962년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에서 행한 연설에서 종교를 철저히 말살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는 종교인들을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고 그 밖의 일부 종교인들 중에서도 악질들은 모두 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북한당국은 1966년부터 1971년 사이에 실시된 ‘주민재등록 사업’과 ‘3계층 51개 부류’ 분류작업을 통해 전 주민을 기본군중과 복잡군중으로 재분류했다. 북한 전 주민은 핵심계층(핵심군중), 동요계층(기본군중), 적대계층(복잡군중)의 3계층 51개 부류로 구분됐다. 기독교인에게는 37번, 불교인에게는 38번, 천주교인에게는 39번의 등급번호를 부여해 적대계층으로 분류했다.

김일성은 종교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1958년 ‘중앙당 집중지도사업’과 1967년 ‘주민재등록사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언급하면서 1971년 일본 도쿄 도지사 미노베 료키치와의 회담에서 북한에는 종교가 없다는 점을 시인했다. 철저한 종교말살 정책으로 인해 1970년대 초에는 북한에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2019년 4월 11일 개정된 북한 헌법은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종교 건물과 종교적 의식을 가지는 것에 대해 승인을 받을 수 있는 허울뿐인 권리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더 나아가 북한 헌법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고 제한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종교에 대한 진정한 입장은 종교인들을 제거하고 종교단체들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북한 내 종교의 존립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2020 북한 종교자유 백서).

세계 최악의 종교박해 국가

북한은 세계 최악의 종교 박해 국가다. 미 국무부는 지난 11월 17일 북한을 21년 연속 종교자유 특별우려국으로 지정했다. 오픈도어즈 USA는 북한을 20년 연속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 국가로 꼽았다. 이 단체는 “북한에서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다”며 “바로 처형되지 않으면 끔찍한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고 지적했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위원회(COI) 보고서는 북한정권이 기독교 전파를 특히 위험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이유에 대해 지적했다. 기독교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북한의 공식적인 개인숭배에 도전하고, 사회적·정치적 집단화와 체제 외부 특히 한국과 미국과의 상호작용을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체제붕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한국과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들의 ‘스파이’로서 ‘정치범’으로 간주된다.

COI는 보고서에서 “북한에 종교적 신앙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신앙은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개인숭배의 사이비 종교집단(cult)에 적대적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김씨 일가에 대한 국가적 숭배를 ‘사이비 종교’로 규정한 것이다. 한 탈북민은 COI가 개최한 워싱턴 청문회에서 “북한사회 전체를 일종의 종교적 단체로 볼 수 있다”며 “종교 지도자는 김일성이며 성경은 주체사상 또는 스스로에게 의존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그는 “만약 기독교나 가톨릭 또는 그 무엇이든지 다른 어떤 종교가 존재한다면, 만약 그들의 주요사상인 주체사상과 어느 정도 경쟁관계가 있는 종교가 있다면 김일성 종교의 기본 토대를 해칠 것이며 이는 북한 지도부가 북한사회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어 “만약 북한주민들이 김일성이 진짜 신이 아니며 다른 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면 이는 북한정권에 좋은 일이 아니”라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북한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다른 종교들을 제거하고 박해하길 원하는 이유”라고 했다.

세계기독연대(Christian Solidarity Worldwide)는 1950년에 북한 전체 인구의 28% 이상이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는 1950년 북한에는 종교적 신앙인들이 2백만 명이 넘었지만 2002년에는 3만 8천 명만 남았다고 지적했다(1950년 북한 전체 인구는 9백만 명으로 보고됐으며, 2002년에는 약 2300만 명이었다). 1950년대 북한 전체 인구의 약 22%를 차지했던 기독교 인구가 북한정권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박해로 인해 2002년 약 0.16%로 급감했다고 지적했다.

1950년대 북한당국이 출판한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해방 당시 북한에는 기독교 신자 약 20만 명이 존재했다. 이는 당시 북한 전체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0년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2차 정기보고서(국가인권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기독교 신자는 약 1만 명, 불교 신자 약 1만 명, 천도교 신자 약 1만 5천 명, 천주교 신자 3천 명으로 전체 3만 8천 명이었다.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약 0.2% 수준이다.

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자유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정치범수용소행 또는 처형

북한정권은 주민들의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철저하게 부인한다. 종교활동에 가담한 사람 특히 기독교인은 고문을 통한 강도 높은 조사과정을 거쳐 철저하게 색출된다. 이후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처형을 당한다. 북한주민들은 어린시절부터의 세뇌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으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해방 직후 북한정권은 잠시 동안 기독교를 허용했지만 6.25 전쟁 후에 모두 숙청했다”며 “김일성 외가 쪽의 가짜 기독교인들만 남겨놓고 진짜 기독교인들은 수용소에 분산수용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독교인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 기독교인은 다 숨어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은 볼 수 없다”고 했다.

탈북민 출신 첫 국회의원인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은 “북한에서 기독교를 믿으면 정치범 수용소에 간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 넘어왔다가 성경과 기독교를 접하고 기도도 많이 하게 됐지만 성경책을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했다. “잘못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가기 때문”이다. 지 의원은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끝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탈북을 위해 두만강을 넘을 때는 그는 남동생에게 “하늘에 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명희 씨(가명, 73세)는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정치범수용소를 가지 않으면 사형”이라며 “그러니까 비밀리에 믿는다”고 했다.

탈북 후 중국에 넘어왔다 강제북송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민들은 보위부에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잔인한 고문도 행해진다.

박민우 씨(가명, 41세)는 “이 사람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중국에서 훈련받고 파송된 사람인지, 그냥 도움을 받는 차원에서 중국교회를 거쳤는지를 보위부 조사한다”며 “만약 이 사람이 중국에서 훈련받고 파송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혹은 처형을 당한다”고 했다. 단순히 중국 교회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라면 불법 월경죄와 밀수, 이 두 가지 죄목을 걸어 노동 교화소에 보낸다고 했다. 그는 “교화소에 수감되면 공민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조사를 하면서 고문을 받는다”며 “특히 도 보위부 예심처에선 중세적인 고문이 자행되기 때문에 살아나오기 힘들다”고 했다.

탈북민 출신의 지현아 작가도 강제북송을 당하면 보위부로부터 “교회에 다녔냐” “하나님을 믿느냐” “미국 선교사를 만났나” “남한 안기부 요원과 만났나”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당한다고 말했다. 지 작가는 “도 집결소에서 기독교인이 밝혀지면 총살당하거나 바로 정치범수용소에 간다”고 했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는 북한정권에 의해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가 거의 전적으로 부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정권은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활동에 참여한 주민을 지속적으로 처형, 고문, 체포해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픈도어즈 USA는 2020년 연말 기준으로 약 5만~7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수감돼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2020년 5월 세계기독연대(CSW)는 북한에서 20만 명 정도가 수용소에 수감돼 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코리아미래전략(KFI)은 1990년부터 2019년까지 북한의 종교 자유 침해와 관련해 생존자, 목격자, 가해자였던 탈북민들과 인터뷰 117건을 토대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체포, 구금, 장기간 심문, 가족의 처벌, 고문, 지속적 신체적 학대, 성폭력, 강제 낙태, 처형 및 공개 재판 등에 처해졌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구금시설에서 철봉에 매달아 놓고 각목으로 때리기, 거꾸로 매달기, 몸에 막대기를 끼워 비틀기, 강제로 쪼그려 앉아 뛰기, 매일 수백, 수천 번 앉았다 일어서기, 매운 고춧가루를 섞은 액체를 강제로 콧구멍에 들이붓기, 종아리 뒤로 각목을 끼우고 꿇어앉히기, 목 조르기, 다른 수감자들의 처형이나 고문 목격 강요, 굶주림, 오염된 음식 강제로 먹이기, 독방 감금, 수면 박탈, 하루에 12시간 이상 고정 자세 강요 등과 같은 다양한 고문을 당한다. 임신한 기독교인들에게는 구금 중에 강제낙태를 종용하거나 출산 직후 태어난 영아를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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