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신앙…개종 거부해 ‘탑’에 갇힌 남녀, 찬송하며 신앙 지켜…박해의 시대, 프랑스 위그노에게서 배우다

[위그노 신앙 계승자와 그들의 발자취] 개종 거부해 ‘탑’에 갇힌 남녀, 찬송하며 신앙 지켜

프랑스 초기 개신교 신자인 위그노의 수난 흔적을 간직한 곳은 남부 지역이다. 앙뒤즈의 ‘사막박물관’은 당시 위그노의 가정과 신앙생활 모습을, 에그모르트의 ‘콩스탕스 탑’은 위그노라는 이유로 갇힌 사람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국민일보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이들 위그노 유적지를 탐방했다. 제1회 한·불 포럼에 참석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회자와 프랑스연합개신교회 목사 등 20여명이 동행했다.

◇저항의 상징, 콩스탕스 탑=콩스탕스 탑은 프랑스 남부 도시 몽펠리에에서 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나오는 중세의 성(城)마을 에그모르트에 있다. 에그모르트는 제8차, 9차 십자군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배를 타던 곳이다. 탑은 높이 40m, 지름 22m로 1240년부터 8년에 걸쳐 축조됐으며 루이 9세가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고딕양식의 탑은 축조 당시인 13세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탑은 16세기 초반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포로를 가두는 감옥으로 변신했다. 위그노의 땅이었던 이곳은 1622년 루이 13세가 남부지역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을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진압작전을 펼친 뒤 가톨릭 세력이 점령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면서 탑은 위그노를 가두는 감옥이 됐다.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됐다. 1층에 여성, 2층엔 남성을 가뒀다. 위그노들은 1층과 2층 중앙에 뚫린 구멍 사이로 시편 찬송을 부르면서 박해를 견뎠다. 당시 많이 부르던 찬송은 시편 68편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1∼6절)

탑이 위그노 여성들만 수감하는 감옥으로 바뀐 것은 18세기 초반 위그노 저항군 카미자르의 대원이었던 아브라함 마젤이 16명의 남성 위그노와 함께 탈출하면서다. 탑을 관리하던 가톨릭 당국자들은 창문에 쇠창살을 설치했고 여성 위그노만 수감했다. 임신부나 노인, 청소년 등 탈출하기 힘든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삭발한 채 생활했다.

가장 유명한 수감자는 마리 뒤랑(1711∼1776)으로 19세에 체포돼 57세까지 38년을 갇혀 있었다. 그는 탑 안의 돌바닥에 ‘저항하라(Resister)’는 글씨를 새겼다. 다른 위그노 여성들과 함께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했으며 시편 찬송을 부르며 견디다 1767년 14명의 여성과 함께 풀려났다. 위그노들은 1787년 루이 16세의 관용령이 반포되기까지 가혹한 ‘광야의 시대’를 살았다.

◇진리 안에서 저항, 사막박물관=위그노 후예 1만명이 지난 2일 예배를 드린 앙뒤즈 야외 언덕 바로 옆에는 사막박물관이 있다. 카미자르 지도자 롤랑의 집을 개조해 1912년 조성했다. 2개의 전시관은 ‘기억’에 초점을 맞춰 당시 위그노들이 사용하던 물건과 문서를 실물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롤랑의 부엌 벽장 끝에는 은신처가 있는데 널빤지를 들어 올려야 찾을 수 있다. 수배 중인 카미자르 대원이나 설교자들이 숨었다고 한다. 도망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시행했기에 설교단은 커다란 통이나 나무 발판 형태로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성찬의 잔도 분해가 가능했다.

성경전시실에선 위그노들이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위그노 가정에 널리 퍼졌던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비롯해 프랑스어 성경 등이 다양한 크기로 전시돼 있다. 축소판 성경은 여성들의 쪽진 머리에 숨기기가 용이했다. 사막박물관 관계자는 “예배 장소와 목사가 없는 위그노들이 박해 시기에도 살아있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가정예배를 드리고 묵상한 성경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그림과 문서, 바퀴모양의 공개처형대 모형, 노예선에 끌려가거나 사형이 집행돼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판도 있다. 밀랍인형방은 위그노 가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두 명의 여성이 망을 보는 사이 할아버지가 손자와 며느리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밀랍인형방 입구엔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죽도록 충성하라.”

앙뒤즈·에그모르트(프랑스)=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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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뒤랑의 생가에서

마리 뒤랑(1711~1776)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프랑스 남동부 론 계곡 주변의 부쉐 드 프란늘. 지리산 자락 오지를 연상케 하는 첩첩산중을 지나며 길을 잘못 들기를 수차례, 힘겹게 다다른 그곳에선 3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석조 건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소박한 예배실을 지나, 박물관으로 꾸며진 살림집 공간으로 들어선다. 벽난로 위의 글씨가 눈에 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1696년 그녀의 아버지가 새겨놓은 성경 구절이다. 순교자 가정의 모든 사람들에게 좌우명과도 같은 문구다. 말씀과 기도로 지켜낸 믿음의 현장이기도 한 방마다 옛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재현해 놓은 전시물과 유물들 사이로 그녀와 가족들이 금방이라도 말을 걸며 다가올 듯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 뒤랑은 19세 때, 오빠가 목사라는 이유로 악명 높은 콩스탕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후 감옥에서 지낸 38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그녀는 동료 죄수들을 돌보고 격려하며 도움을 주는 가운데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녀는 환자들의 간병인 역할을 했으며, 환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여인들을 다정스럽게 대해주었다. 바느질을 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편지를 읽어 주는가 하면, 대신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매일 밤 여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편 말씀을 낭독해줄 뿐 아니라 오빠 피에르 뒤랑 목사의 감동적인 설교를 눈물로 전해주었다. 그녀의 보살핌과 설교말씀을 통해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후에 그녀는 박해당하는 프랑스 개혁교도들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 힘쓰기도 했다.

그들은 성경 보관 및 읽기를 금하는 왕의 칙서에도 불구하고 온갖 방법으로 성경을 숨겼으며, 계속 성경을 읽었다. 발각되면 남자들은 노예선으로, 여자들은 감옥으로 보내졌다.

문득 벽면 한쪽, 사람 어깨 폭 정도의 장방형으로 파인 곳에 시선이 멈춘다. 이렇다 할 장식도 없고, 그냥 지나칠 법한 공간이다. 도대체 이 공간은 무슨 용도일까? 안내하는 분의 말대로 오른쪽 벽면 안쪽으로 왼손을 넣어 본다. 그 안으로는 다른 홈이 이어져 있는데, 바로 그곳에 성경을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불시에 가택수색을 할 때,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홈이 파인 공간의) 왼쪽 벽면을 더듬어 찾기 마련인데, 바로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손이 쉽게 닿지 않는 반대쪽 벽면 안쪽에 성경을 숨긴 것이다.

방을 나오기 전, 그 홈 안에 다시 손을 넣어 본다. 말씀을 위해 이토록 고심했을 분들의 간절한 마음이 차갑고 깔끄러운 벽면에서 손끝으로 느껴오는 듯하다. 박해와 순교라는 말이 피부로 와 닿기 힘든 오늘날, 첨단 매체로 손쉽게 성경 말씀을 대할 수 있게 되었건만, 이 벽면 안쪽 홈에 성경을 숨겨두던 분들의 믿음에 턱없이 못 미칠 우리의 인스턴트 신앙을 다시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 들소리신문(http://www.deulsoritimes.co.kr)

http://www.deulsori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42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최종] 위그노들의 순교

프랑스 위그노에게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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