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도 국군포로 문제 제기했지만… 文정부 외면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에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5만~6만 명에 달한다. 국방부는 정확한 규모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들을 모두 전사자로 처리했다. 1994년 고(故) 조창호 소위의 귀환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총 80명의 국군포로가 돌아왔다. 대부분이 자력 탈출이거나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은 경우고, 정부 기관이 주도적으로 구출한 사례는 없다. 2010년 이후로는 국군포로 귀환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위해 취한 조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계기에 일부 국군포로의 생사 확인을 북측에 요청하는 수준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국군포로의 송환을 촉구하거나 유엔 등을 통해 송환 여론을 조성하는 등의 활동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게 북한 인권단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군포로 12명과 납북자 8명을 구출한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그래도 김대중 정부 때는 ‘뭐라도 같이 해보자’는 식이었지만, 현 정부는 그런 조짐 자체가 없다”며 “이번에도 조양탄광 국군포로 명단을 국방부에 전달했지만 개인정보보호법을 운운하며 아무것도 공개할 수 없다고만 하더라”고 했다.
앞서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3월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에서 “송환되지 않은 북한 내 전쟁포로(국군포로) 및 그 후손들이 지속적인 인권침해에 시달리는 데 우려를 표한다”며 국군포로 등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 대화·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과 대화할 때 인권 문제 언급을 금기시하는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5차례의 고위급 회담, 2차례의 대북 특사 파견을 하면서도 국군포로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룬 적이 없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은 최근 “북에서 당한 가혹행위를 조사해달라”며 찾아온 고령의 귀환 국군포로들 앞에서 ‘거제도 수용소에 있던 중공군 포로의 피해에 관심이 많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포로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의 가혹행위와 관련한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갔다가 되레 중공군 포로 피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국군포로 송환 68년 동안 北에 요구조차 못한 한심한 정부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들이 평안남도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내몰리고 있다는 증언이 4일 나왔다. 1960년대 북한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일가족이 탄광으로 추방됐다는 탈북자는 최근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를 통해 당시 알고 지낸 국군포로 9명 실명과 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정부는 “국군포로 신원 정보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따라 공개할 수 없다”며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유엔이 추산한 국군포로·실종자는 8만2000여 명이다. 당시 연합군은 북한 인민군·중공군 포로 8만3000명 모두를 송환했지만 북한은 유엔군 5000명과 한국군 8800여 명만 돌려보냈다.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괴뢰군 포로’ 딱지를 붙인 채 핍박과 차별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넘게 탄광 발파나 불발탄 처리 같은 위험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대다수가 숨지고 생존자는 수백 명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정전협정 이후 68년 동안 북한에 국군포로 송환 요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1994년 고 조창호 소위를 비롯해 2010년까지 총 80명의 국군포로 귀환이 이뤄졌으나 자력 탈출이거나 인권단체 도움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 정부 들어서도 3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국군포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진 적은 없다. 반면 정부는 4·3사건, 여순사건 희생자에 대해선 명예 회복과 보상까지 거론하고 6·25남침 공로로 북한 훈장을 받은 사람을 국군의 뿌리인 양 추켜세우고 있다.
게다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고령의 국군포로들 앞에서 “거제도 수용소에 있던 중공군 포로의 피해에 관심이 많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모독하기도 했다.
현충일 서울도서관 외벽에는 6·25전쟁 생존 참전용사 131명 사진과 함께 ‘마지막 한 분까지 기억하겠습니다’는 문구가 내걸렸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달려간 국군포로들이 조국 품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최우선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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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탈북 국군포로들, 과거사위에 “국군포로 진상 규명 해달라”
24일 탈북 국군포로들이 과거사위원회에 “국군포로 송환 거부 및 강제 노역, 가혹 행위 등 진실을 규명해달라”며 신청서를 접수한다.
국군포로 송환과 탈북자 인권 운동을 벌이는 사단법인 물망초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24일 오전 10시 30분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원장을 면담 후 신청서를 접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물망초는 “국군포로였던 한○○, 김○○, 이○○ 등이 이날 신청서 접수에 참여한다”고 했다.
탈북 국군포로들은 “실종된 국군은 8만2318명이었으나 포로 교환 시 송환된 이는 8343명에 불과했다”며 “국군포로 및 그 가족들이 70년 동안 북한에 강제 억류된 상태에서 강제노역, 가혹행위, 사회적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고사하고 기초적인 실태 조사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탈북 국군포로들이 이 세상을 다 떠나기 전에 하루속히 진실 규명을 해달라”고 주장했다.
물망초는 “신청자들은 ▲6‧25 당시 북한 인민군이나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가 40~50년 만에 탈북해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자신들이 전쟁이 끝나고도 송환되지 못한 이유와 그 과정▲ 북한에 강제 억류된 까닭 및 과정 ▲포로의 95% 이상이 탄광에서 강제 노역해야 했던 과정 ▲전후(戰後)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국군포로들의 인권 유린이 지속되는 점 등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정확하게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고 했다.
유엔인권이사회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2014년 국군포로 문제를 보고서에 포함했다. 올해 3월 23일에는 처음으로 국군포로의 인권 문제를 적시했다.
물망초는 “탈북 국군포로들은 국군포로 문제가 국제 사회의 중요한 전쟁 범죄 및 인권침해 이슈로 부상했기에 처음으로 탈북 국군포로들이 우리 정부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라고 했다.
실종·포로 8만2318명 중 18명 생존
1953년 8월 유엔군사령부는 6·25전쟁 중 북한군·중공군에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국군이 8만2318명이라고 발표했다. 이 중 포로 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 7만여 명의 국군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7만여의 국군 중 약 5만~7만명은 국군포로로 추산되며, 미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의 수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한다. 포로의 대다수는 자신 의사와는 무관하게 북한에 억류돼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북한은 지금도 “국군포로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군포로를 모두 ‘내무성 건설대’에 편입해 ‘전향’시켰기에 ‘명목상의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994년 조창호 소위(귀환 후 중위 진급)가 생환하기 전까지 국군포로의 존재는 잊혀왔다.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하라’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단 한 명의 국군포로도 돌려받지 못했다.
지난해 7월 14일에는 91세의 귀환 국군포로가 생을 마감했다. 탄광에서 40년 넘게 일한 그는 진폐증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약 500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추정하지만, 이는 10년 전의 통계를 검증 없이 받아쓴 자료에 불과하다. 국군포로 송환 활동을 펼치는 단체는 현재 북한에 70~200명의 국군포로만이 생존할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고(故)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총 80명의 국군용사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2011년부터는 귀환 행렬도 끊어졌다. 올해 5월 24일을 기준으로 단 18명만이 생존해 있다. 현재 국군포로들의 평균 연령은 약 91세에 이른다.
글=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http://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2563&Newsnumb=20210512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