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의 심기 거슬러 죄송” 100개 대학에 붙은 반성문 정체…대통령이 청년 고소하며 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나라

“각하의 심기 거슬러 죄송” 100개 대학에 붙은 반성문 정체

“대통령 각하의 심기를 거슬러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의 모교인 경희대를 비롯해 전국 100개 대학가에 이 같은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를 제작해 게시한 신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전대협)는 9일 오후 10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것은 대통령의 지시로 올리는 반성문”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청와대 사랑채 부근에도 반성문을 부착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기자회견 과정에서 경찰ㆍ청와대 직원들에게 제지당하는 등 대치 상황이 벌어져서다. 김태일 신전대협 의장은 “반성문을 썼으니 제출하러 갔던 건데 여기저기서 경찰 60여명이 튀어나와 반성문을 붙이진 못했다”고 말했다.

신전대협은 반성문에 “사실을 말해서 죄송하다. 다른 의견을 가져서 죄송하다. 표현의 자유를 원해서 죄송하다. 공정한 기회를 요구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신전대협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입시 비리,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비리, 문재인 대통령 아들에 대한 특혜 의혹 등을 언급하며 “저희 대학생들은 문재인 정부가 20·30세대의 삶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공정한 질서를 해체했다. 지금껏 말해온 공정과 정의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는 촛불을 들고, 대자보를 붙였다. 대학생활 내내 화염병을 던지고 대자보를 붙이던 분들이 집권했기에 이 정도 표현의 자유는 용인될 줄 알았다”면서 “그러나 착각이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댓글이든, 대자보든, 전단이든 모두 탄압했다”고 덧붙였다.

김태일 신전대협 의장은 대자보를 게시한 이유에 대해 “성찰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청와대 지시’에 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4일 문 대통령이 자신과 가족에 대한 인신 모독성 전단을 뿌린 30대 남성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라고 지시하면서,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성찰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개별 사안에 따라 신중하게 판단해 결정할 것’이라고 추가 고소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대한 풍자다.

전국 대학생 6000여명이 가입해 활동 중인 신전대협은 지난 3월 당시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의 도쿄 아파트 재산 축소 신고 의혹과 관련해 대검찰청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

청년 고소하고 1년반 방치… 법의 門을 가로막은 文 대통령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지난 5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30대 청년 김정식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자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모욕죄는 친고죄. 피해자가 고발해야만 수사가 가능하다. 일국의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뻘인 국민의 언어 표현에 모욕감을 느끼고 그것을 경찰에 고소했다는 소리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개 시민을 고소하는 ‘좀스럽고 민망한’ 국가 지도자가 또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이 사안은 문재인이라는 한 자연인의 인격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건전한 법 관념의 근본을 부정하고 있다. 경찰, 검찰, 법원은 대통령 권력의 폭주를 제어하기는커녕 장단을 맞추는 일에만 급급하다. 우리의 법치주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펼쳐보자.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아주 짧은 우화로 카프카는 법이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가장 부조리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한 시골 사람이 문지기에게 다가와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내줄 수 없다’고 한다. 시골 사람이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묻자 문지기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는 답을 돌려준다.

시골 사람은 법 안으로 들어가려 기다린다. 문지기는 시골 사람이 문 앞에서 기다리도록 허락한다. 쫓아내지 않을 뿐더러 작은 의자를 내어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법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는다. 시골 사람은 애원하고, 간청하고, 뇌물을 바치기까지 하지만 문지기는 요지부동이다. 들여보내지 않는다.

세월이 흐른다. 시골 사람은 늙었다.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귀는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시골 사람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 법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자 죽어가는 시골 사람의 귀에 대고 문지기가 소리를 지른다. “이곳에서는 너 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겠다.”

문학인들은 이 이야기를 그저 상징과 은유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렇지 않다. 이 우화는 어떤 면에서는 리얼리즘 소설에 가깝다. 법이 부조리하게 작동하여 끝없는 유예 상태에 누군가를 묶어놓음으로써 인생을 망가뜨리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식씨를 고발한 후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보자. 문제의 전단이 국회 분수대 주변에 살포된 것은 2019년 7월.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김씨를 모욕죄로 입건하고 정식 수사를 진행한 것은 그해 12월의 일이다. 그러나 사건이 마무리된 것은 2021년 5월 4일. 무려 1년 반이나 ‘수사 중’인 채로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를 ‘피의자’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위험 인물로 낙인찍은 후 그 상태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권력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인권침해 유형 중 하나다. 카프카가 소설에서 묘사한 부조리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과 경찰은 김정식이라는 한 청년을 법의 문 앞에서 1년 반이나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 것이다.

당신이 경찰 수사를 받는 피의자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 상태라면 대기업이나 공무원 등 소위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고울 리 없다. 언제 경찰에서 추가 조사를 하자고 연락이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된다. 마치 법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시골 사람처럼, 매일같이 조금씩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 살게 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소위 진보 개혁 진영의 지식인들이 염불처럼 외우고 다니는 말 중 하나다. 법은 정의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신속해야 한다. 설령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피의자 신분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많던 ‘양심적 법조인’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카프카적 부조리가 현실이 되었다. 대통령이 한 청년의 목에 투명한 올가미를 걸고 당기지도 풀지도 않은 채 2년 넘게 괴롭혔다.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법적 불법’이 자행된 것이다.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며 비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진지하게 화를 내고 분노해야 한다. 법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