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한 존재 태아… 강한 자들 이해관계에 희생돼선 안돼
낙태죄와 살인죄는 형법상 생명보호의 양대 축이다. 헌법재판소는 부녀의 자기낙태죄(형법 제269조 제1항)와 업무상동의낙태죄(형법 제270조 제1항)의 행위 주체 중 ‘의사’인 경우에 한해 해당 규정이 과잉금지원칙 등의 사유로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난해 말까지 이 규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그 효력이 상실된다며 일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자연법적으로 각 사람이 누리는 인간의 존엄성은 각자에게 고유한 절대성을 갖기 때문에 상호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의 실존적인 토대가 되는 각 사람의 생명도 상호 비교형량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갓난아이의 생명과 청장년의 생명의 가치 경중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건강한 사람의 생명과 노약자의 생명이나 사기(死期)에 임박한 사람의 생명 사이의 가치 경중도 가릴 수 없다.
극단적인 예로, 태아의 생명과 산모의 생명도 가치적 경중으로 차별할 수는 없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암 말기 환자의 생명과 기관차처럼 활력 넘치는 청년의 생명을 저울질해 어느 생명의 가치가 더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만약 생명의 경중을 판단한다면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질서는 이미 정당한 법질서이기를 포기한 불법질서에 불과할 뿐이다.
형법의 모든 법익 중 최상위의 법익, 즉 법익 중의 법익이 인간의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이 전제되지 않은 신체의 완전성, 각종 자유, 명예, 사생활의 평온, 재산 등은 공허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생명은 법익 피라미드의 정점에 놓여있다. 인간 생명의 기원과 그 신비에 관한 설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의학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형이상학과 신학 및 모든 고등종교의 영역에까지 이른다.
그것은 또한 선과 가치의 경중을 가리는 최종적인 준거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은 유일성과 신성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절대적 평등성, 불가교량성, 불가처분성 등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최대한 보호돼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생명에 유리하게’라는 원칙은 모든 정당한 법 윤리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법의 숭고성은 한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데 있다. 인간의 생명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바,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이니 ‘보호할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는 말이 어떤 경우에도 천박한 포퓰리즘적 사회정책이나 야만적인 이데올로기의 빌미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박탈은 오직 정당 방위나 방어 전쟁과 같은 정당화 사정이 있을 때만 극히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인간 생명을 직접적인 최상위의 보호법익으로 삼는 죄형법규로서 형법은 ‘살인의 죄’(형법 제24장)와 ‘낙태의 죄’(형법 제27장)를 두 주축으로 삼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형법상 낙태의 죄의 객체인 태아는 수정 후 13일이 경과할 즈음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때부터 시작해서 태아 배출을 위한 진통이 개시된 때까지로 본다.
낙태죄의 주된 보호법익은 임부의 자궁에 있는 태아의 ‘생성 중에 있는 생명’이다. 살인은 분만개시(진통 시)에서 시작해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생명을 보호법익으로 삼는다. 낙태죄와 살인죄가 형법상 생명보호의 양축이다.
낙태죄 규정이 결국 헌법재판소가 정한 시한 내에 개정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6개의 법안이 제출돼 있음에도 국회가 이 논의를 회피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일부 의원은 앞장서서 낙태죄가 폐지됐음을 선언하고 있다. 몹시 마음이 아픈 상황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 존재 중 가장 약한 존재자는 태아다. 낙태는 강한 자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얽혀 가장 약한 자의 무고한 생명 싹을 싹둑 잘라내는 잔인한 살해행위다.
강한 자들이 자기결정권과 같은 그럴듯한 논증 도구를 내세워 태아를 살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소리 없는 영혼의 아우성은 낙태 가담자들 마음에 씻기 어려운 악독으로 남아 그들의 정신마저도 황폐함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정통 생명윤리관에 기초해 인간의 생명은 수정 시부터 신성하다는 가치관에 확고히 서 있다. 이것이 헌법적 가치관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는 이 가장 연약한 인간 생명을 위한 사회운동과 이를 위태롭게 하는 법의 비판 운동에 나서고 있다. 국가의 어떤 기관도 이 고귀한 생명을 마치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대상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낙태 자유화의 길로 치닫는 헌재의 기울어진 시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들의 작은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태아의 생명을 목적 그 자체로 존대하는 낙태 관련법 개정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
낙태 막기 위해… 이제 본격 기도를 시작할 때
프로라이프 활동을 하고 있다 보니 새해들어 뉴스를 보고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하십니다. “입법시한이 지났고, 언론에서 낙태죄가 폐지되었다고 환호성하며 연일 기사를 뿜어내는데 앞으로 어찌되는 것이냐?”
사실 가장 우려했던 상황입니다. 정치와 입법이 맞물려 있는 상황 속에서 여러가능성을 감안하면서도 가장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아가들에게 가장 비극적이고, 비겁한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국회는 언제부터인가 중요한 법안보다는 이슈가 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법안에 대해서 아무런 입법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미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져 기본권 침해가 인정되어 조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음에도 방치되고 있는 법안들이 여러 건 존재하고 있고, 이제 형법도 그런 법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총선 이후 국회가 새로 개원하게 됨으로써 낙태죄에 대해 제대로 논의될 시간이 없었음에도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사후 입법시한 연장이나 변경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가 전무하기 때문에 어쩌면 입법시한을 도과하는 것은 사전에 예정된 것과 같았는데, 문제는 이것을 이용하여 낙태죄가 영구히 없어졌다는 여론을 형성하고, 후에 낙태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라도 하면 배신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언론과 급진 페미니즘, 그리고 그에 휩쓸려 가고 있는 세대의 흐름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일부 여당 의원들은 입법시한이 채 도과하기도 전인 12월 30일에 낙태죄가 폐지될 것을 전제로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온라인 토론회를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태아의 생명권을 기본권으로 인정했고, 이 기본권을 법을 통해서 보호하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맞게 형법을 개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회의원이 나서서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를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국회의원은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형법상 이 직무유기는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또 형법상 낙태죄의 효력상실 상태로 인하여 헌법상 분명히 인정되는 태아의 생명권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이것을 헌법상 문제삼기도 곤란한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 법률의 헌법 위반을 문제제기 하기 위해 기본권 침해를 당한 본인이 헌법소원 또는 위헌법률심판의 청구를 하여야 하는데 낙태죄의 폐지로 인해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태아의 경우 낙태행위가 이루어지는 즉시 살해되어 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권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현행법으로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 문제삼기 어려운 상황으로 국회의 논의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어찌할 방안이 없습니다. 도무지 답답한 마음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딱 두 마디를 주셨습니다. “듣든지 아니든든지”
(에스겔 3: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존귀함을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제도화가 되는 아니든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유일한 의무인 것입니다.
아무래도 현재 상태가 한두달 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바라기는 훗날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의 낙태율이 2020년 이전과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는 기독교인의 낙태율이 확연히 줄어들어 전체 수치를 낮추었기 때문이다.”는 결과가 보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참고로 94년 조선일보와 갤럽이 낙태현실에 대해 조사하였는데, 이 때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약 150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지며, 세 번 이상 낙태를 세 번 이상 경험한 여성들의 종교를 분석한 결과, 불교 32%, 무교 22.1%, 개신교 30.1% 라는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은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최후의 무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센 것을 준비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를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 주가 일하시네(이혁진 작사, 작곡)
연취현 변호사(행동하는 프로라이프 법률정책위원, 연취현 법률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