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 코로나 독재 시대
‘우리는 매일 사신(死神)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고 사신(死神)의 품에서 잠이 깬다.’
괴테의 시집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이 철학적 문장은 그러나 1970년 연탄가스 중독이 일상사가 되었던 우리 사회를 개탄하던 국내 한 신문 사설에 등장한 글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연탄가스 중독은 그 규모나 치명률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연탄가스 중독 사망은 전염병에 대한 방역체계가 미비했던 그 시절의 제1종과 제2종 전염병을 모두 합친 발생률과 사망률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이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면에서 공포와 충격 그 자체였다. 연탄가스에 대한 사회적 불안감은 세입자가 연탄가스로 사망하면 집주인을 구속하는 식의 터무니 없는 규제들과 처벌들을 양산했다.
2020년 대한민국에는 연탄가스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 대신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질병의 공포가 엄습해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연탄가스와는 달리 코로나19가 사람으로부터 전염된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사람이 마치 연탄처럼 위험 인자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이런 유행성 질병의 확산 시기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등장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국 의학 역사가 귄터 리스(Guenter B. Risse)는 1656년 로마의 역병, 뉴욕의 1832년 콜레라 유행과 1916년 소아마비 유행을 조사한 결과 유행병이 창궐하게 되면 사회는 이러한 질병 유행의 책임을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수 인종들처럼 그 사회의 주변부 집단에 돌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주로 빈민, 이민자, 유태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본성은 정치가들로 하여금 ‘공공의 적’을 설정하고 싶은 유혹을 선사한다. 그러한 포퓰리즘 선동 과정에서 권력의 획득이 맹목적인 지지로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기를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는 자들
지난 5월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팬데믹은 도시를 바꾼다’라는 제하의 논문에서는 20세기 초 독일 도시들의 독감 사망자와 나치 득표율을 분석을 토대로 스페인 독감 때 사망자가 많았던 독일 도시들이 나치에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제시됐다.
1918~1920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미 질병관리본부의 추산에 의하면 전 세계에 약 5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에서는 약 29만 명이 사망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한 블리클 연구원은 그 이유를 나치의 반(反) 유대인 노선 등이 전염병 피해에 대한 분노를 남에게 돌리려는 경향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봤다.
비슷한 상황은 대한민국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적폐청산’을 정치적 국정과제로 내걸고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나치가 유태인을 ‘사회 악’으로 규정한 것처럼 자신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불살라 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런 대상에는 보수적 기독교 세력도 포함됐다. 코로나19 방역은 광화문에 시민들의 집회를 경찰 차벽으로 차단하고 교회 예배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개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모인 그런 밀집 공간의 성격이 밀집이 허용된 러시아워 시간대에 출퇴근 승객으로 가득한 만원(滿員) 지하철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코로나19 방역이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 이유다.
이러한 방역의 정치성은 국가 권력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도 무의식적 침해를 가하게 되는 경로를 찾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자가격리자에 대해 성범죄자에게 하는 방식의 손목밴드(안심밴드)를 강제 착용하도록 하려다가 인권 침해 논란에 직면하자 자가격리 위반자에 대해 착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된 경우다.
자가격리자를 무슨 예비 범죄자라도 되는 듯이 다루려 했던 문재인 정부의 발상은 그 내부에 전체주의, 파시즘적인 내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이에 대해 이상철 변호사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희생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들의 경우 그 인권적 침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코로나19에 걸린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님에도 일단 ‘확진자’라는 이유로 모든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 그의 과거 동선은 모두 국가에 보고되어야 하고 그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고백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방역 때문이라면 그렇게 해서 코로나19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와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8월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이 밝힌 바와 같이 전파경로가 오리무중인 깜깜이 확진자 증가세는 31.9%에 달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전파력이 강력하다는 점에서 아무리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접촉자들을 받아낸다고 해도 이처럼 30%에 달하는 깜깜이 확진자들이 존재하는 한 정부의 확진자 추적 방역은 개인들이 당하는 프라이버시 침해의 인권보다 그 공익이 크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이와 관련 곽은경 자유기업원 기업문화실장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 이를 다른 용도로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한번 시작된 간섭과 통제는 반복되거나 일상화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부는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질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보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자유의 본질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헌법의 규정이다.
이때 자유의 본질이 침해되는가는 정부의 과잉대응성 여부로 판단된다. 이때 공익을 달성하려는 정부의 목적과 수단 간에 정합성은 중요한 헌법적 판단 근거가 된다. 아무리 정부의 목적이 좋아도 이를 달성하려는 수단에 정합성이 없는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은 위헌이다.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의 목적과 수단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는 점은 서울과 수도권의 깜깜이 확진율 30%가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록다운(봉쇄조치)을 풀고 완화조치를 통해 집단면역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그럴 경우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기에 관료들이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현실이다.
집권당인 민주당 역시 정치 방역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국을 유지하고자 하는 판단으로 인해 완화조치는 수용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를 보는 관점이 변해야
질병의 사회사 연구의 문을 연 찰스 로젠버그(Charles E. Rosenberg)는 미국에서 1832년, 1849년과 1866년에 세 차례 크게 유행한 콜레라가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한 질병이었으나 미국 사회가 콜레라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바가 세 시기가 모두 달랐다는 것을 그의 고전적 역작<콜레라 시대 The Cholera Years>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즉, 동일한 질병이라도 사회에서 이를 인식하는 것은 각 시기의 구성원들의 지식, 가치, 문화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그에 따라 이에 대한 해결과 대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병과 환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코로나19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조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코로나19에 대해 봉쇄조치들을 풀고 집단면역을 실시하자는 주장도 결국 코로나19에 대한 관점을 단순한 위협에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관점은 연탄가스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취한 조치들을 돌아볼 때 더 설득력이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면 연탄가스 사고의 피해는 ‘온돌쟁이’라는 시공업자들의 책임으로 몰아 이들을 구속하거나 심지어 가정부가 연탄가스로 사망하면 가정부를 고용한 집 주인이 구속되어 처벌받는 식으로 규제가 전개됐다.
셋방에 아버지와 딸이 연탄가스로 중독사하자 집주인을 과실치사혐의로 입건해 처벌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에 대한 처벌과 감시는 70년대 홍수처럼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감소하지는 않았다. 연탄가스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킨 것은 경제 발전으로 가정의 연료가 연탄에서 도시가스로 변화였다.
같은 원리로 코로나19도 결국은 그 예방과 치료가 시장에서 강력한 수요로 등장할 때만이 극복될 수 있고 우리는 이를 위해 자유와 성장과 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유행성 질병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한 주체는 언제나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었다는 점은 코로나19 역시 그 해결의 수단을 기업들이 제공할 것이라는 합리적 믿음을 가져다 준다.
그러기 위해 통제와 억압의 수단에서 우리는 자율과 협력이라는 자생적 질서(Spontaeneous Order)의 섭리와 지혜를 믿어야 한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744
빅브라더 ‘코로나 행정부’…우리 사생활은 안전한가?
보편적 코로나19와 민주주의의 위협
고대 정치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정치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제시했다. 정치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이 일치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조화일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현대 국가에서 이를 조화하기는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현대에 주목받는 이유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 제기된 공동체의 안전과 개인의 자유권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코로나19가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각 국가는 봉쇄와 사회적 거리두기, 집회 결사와 종교활동의 제한, 이동의 자유 축소 등 방역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한국의 경우, 초기 방역 과정에서 혼란도 있었지만, ICT(정보통신기술) K-방역과 성숙한 시민의식에 힘입어 다른 국가에 비교해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선제적 K-방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대표적으로 프라이버시 침해, 감시와 같은 시민권 침해와 지나친 행정 권력의 강화 움직임, 기업에 의한 위치정보 등의 무분별한 공개 등 비민주적인 관리에 대한 지적이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코로나19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지금부터라도 간과했던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위협요인을 최소화하기 위한 법 제도적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공동체의 안전과 시민권의 조화를 위한 제도 정비,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 제고를 위한 교육의 강화 등이 있을 것이다. (필자)
한국 2500명당 1명꼴 감염
2020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는 코로나19(COVID-19)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 동향과 방역 상황을 보는 것은 일상사가 되었다. 한국인의 일상에서 10시만 되면 중앙방역대책본부의 브리핑도 익숙하다. 한국의 코로나19 현황은 9월 14일 현재 2만2285명이 감염되었다. 전 국민으로 환산하면 2500명당 1명꼴로 감염된 상황이다. 여기에 무자각 감염자를 더하면 비율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전 세계적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 현황을 알려주는 존스홉킨스대학 시스템 사이언스·엔지니어링 센터(Johns Hopkins Center for Systems Science and Engineering)는 9월 14일 기준 2889만2810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사망자도 92만2525명으로 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전 세계적으로 상반기 1차 팬데믹은 알지 못한 감염병의 공포에 속수무책 당했다면, 이제 어느 정도 의료정보를 가지고 준비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2차, 3차 팬데믹은 잠재되어 있고, 근본적인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당분간 코로 19는 우리와 같이 공생할 분위기다.
K-방역이 불러온 논쟁
한국은 코로나19가 대량 감염된 중국과 인접하고 교류가 활발한 영향으로 코로나19에 무방비 상태였다. 거기에 대구 신천지 교회, 이태원 클럽, 광화문 집회 관련 재확산으로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감염자 수가 2만 명을 넘었다. 하지만 초기부터 시작된 정보통신기술(이하 ICT)기반의 K-방역이 정착되면서 안정세로 돌아섰다. 이에 치료제나 백신개발 이전까지 관리 가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ICT를 활용하여 비대면 진단에서 드라이브 스루 도입, 인터넷 제안을 통한 공공 마스크 제도, 검사장비와 결과의 신속한 문자정보 제공, 재난 문자 시스템 구축, 스마트 폰 및 카드이용 조회, GPS 추적, CCTV, 대중교통 이용, 자가격리 앱, 빅데이터 활용 등의 수많은 ICT기반 방역체계가 있었다. 전통적인 공공의료 체계에 ICT이 결합되어 진단, 추적, 격리가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런 성과로 미국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는 한국의 사례를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며, 민주주의 국가들이 코로나19에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 ICT 방역과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그리고 시민권 제한을 최소화하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국가로 평가했다.
이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K-방역의 핵심 ICT의 적극 활용이다. 감염경로 추적기법과 감시 체계 구축에서 빅데이터와 GPS 추적, 스마트 폰 관련 기술을 적용하여 감염자 동선을 파악하여 선제적으로 방역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이 성과를 거둔 것은 이태원 클럽 방문자 방역 과정이었다. 당시 ICT를 활용하여 클럽 방문자 5517명의 인원을 확인했고, 클럽에 30분 이상 방문자 5만7536명을 파악하여 검사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빅데이터와 스마트폰 위치추적, 사회연결망 분석 등을 활용한 방역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코로나19 초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던 한국의 ICT 활용 방역에 몇몇 우려의 목소리도 등장했다. 비판은 외부에서 시작되었다. 핵심 내용은 민주주의 기본권이 방역 과정에서 제한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Les Echos)가 지난 4월 6일 발행한 ‘코로나 바이러스와 추적: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비르지니 프라델 변호사는 한국의 ICT 활용 개인정보 추적 시스템이 심각한 개인 감시라고 비판했다. 이어 12일에는 프랑스 정부 과학자문위원인 감염병 학자 드니 말비(Denis Malvy) 박사가 ‘한국의 시스템은 극단적으로 사생활 침해적이다. 유럽 차원에서 이 방식을 허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공동체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정서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구식 개인주의 가치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 제기는 단순히 프라이버시에만 한정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코로나19 방역에서 단순한 효율성만 추구해서는 안 되는 민주주의 가치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 네트워크사회로 진입하면서 ICT를 활용한 감시 우려감은 시민의 자유권 침해 관점에서 계속되었다. ICT가 통제되지 않는 초국적 기업이나 국가를 시민이 감시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도 가능하지만, 권위주의 국가의 독재 강화를 위한 시민권 제한으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에 관하여 카스텔(Castells)은 ICT가 정치와 행정정보의 투명성을 높여 국가와 초국적기업의 무절제한 독주를 감시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오래전에 경고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테러‧전쟁이나 미지의 질병으로 인한 공포는 국가의 시민 보호를 내세운 ICT 감시와 통제 강화라는 부작용을 만들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방지법이라 불리는 ‘애국법(USA PATRIOT ACT)’이다. 정보 네트워크 사회에서 이미 테러 대응책으로 다양한 감시 도구가 발전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테러리스트 정보를 공유하거나 인터폴의 수사 능력 강화를 위한 협조가 진행되었다. 미국에서는 반테러의 명분으로 GPS, 인터넷, 스마트 폰, CCTV 및 IC 카드의 광범위한 사용과 결합하여 개인 감시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2005년 7월 52명을 숨지게 한 런던 7·7 지하철 자살폭탄 테러에서 CCTV를 활용해 용의자를 검거함으로 런던의 감시 체계에 대한 우려감도 대두되었다.
코로나19와 민주주의의 3가지 위협요인
정보 네트워크사회에서 테러나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민 감시의 문제가 대두되었다면, 이제는 감염병으로 인한 감시가 부각되었다. 한국에서도 개인정보 유출과 종교 및 집회의 자유 등 시민권 침해, 강력한 정부 통제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해결할 과제도 존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코로나 19 방역과정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ICT 활용의 방역이 지나칠 경우, 사생활 침해나 감시,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 둘째, 스마트 기기에서 위치 정보 제공 기준과 부작용 등에 대해 재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민주주의 권력 분립이 비상 상황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할지에 관한 대응의 미비이다.
첫째, ICT를 활용해 국가의 사전적인 방역 활동이 지나치게 개인정보를 유출하거나 집회결사‧종교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방역 당국은 초기부터 스마트 폰, 신용/교통카드 이용, GPS 추적, CCTV, 대중교통 이용, 자가 격리 앱, 빅데이터 활용 등으로 선제 확산 차단에 나서고 있다. 특히 한국은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개인정보와 동선 공개 등 위치 정보를 포함한 상당한 정보를 중앙집중식 추적체계로 관리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은 개인정보 노출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서 자칫 사생활 침해와 감시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전대미문의 감염병 유행에서 공동체의 안전을 강조하는 정부와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시민권을 강조하는 가치의 충돌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원칙을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상 상황이라는 기간의 설정에서 일부 개인의 시민권은 제한될 수 있지만 공포를 확대하여 개인의 권리를 무제한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이미 팬데믹으로 인한 갈등은 전 세계적으로 이동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넘어서 종교집회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등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지에서는 시민운동가를 중심으로 “자유를 달라”는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지난 3월부터 봉쇄(lockdown)가 진행되면서 강제적 규율이 일상화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으로 자유권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공동체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시민권 사이에 긴장이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는 단기간의 방역 효율성 차원에서 우리가 잊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시민권 보호와 관련한 법제도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둘째, 개인이 방역목적으로 제공하는 스마트 기기 위치 정보 제공과 폐기 기준에 대해 모호함이 존재한다. 정보의 자기통제권이 무시되고 개인의 모든 정보가 지나치게 기업이나 시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 그동안 빠른 ICT 발전 속도에 가려져 있었지만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기업들(특히 단말기 및 앱 개발사)은 지나치게 개인의 위치 정보와 프라이버시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심지어 앱 설치에서 ‘동의’를 하지 않으면 설치가 안 되는 강제적인 방법도 적용하고 있다. 카드, 게임, 온라인 마켓, 운동, 건강정보를 간단한 동의만으로 기업들에 개인정보를 모두 제공한 셈이다. 최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동통신사들이 가입자의 동선을 보여주는 휴대전화 위치확인 정보(기지국 접속기록)를 몰래 별개의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했다. 실제 코로나 19로 인해 방문하는 상점이나, 공공기관, 학교 등 개인정보 제공 동의는 매일 늘어나는데, 쌓이는 개인정보의 사후 관리, 폐기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내가 기업이나 식당에 제공한 개인정보가 나중에 어떻게 악용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 거래시장에서 나의 전화번호와 개인정보가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코로나19가 빅브라더(big brother)를 만들 위험도 존재한다.
셋째, 코로나19로 야기된 또 다른 쟁점은 지나친 행정 권력의 강화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지배를 지칭하지만, 실제적인 통치행위는 행정부가 담당한다. 특히 전쟁이나 테러 등의 위기 상황에서 행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은 중요하다. 그러나 과도한 중앙집중형 리더십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인 권력 분립을 위협할 수도 있다. 방역과 검사, 신속한 의사결정을 의한 콘트롤타워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행정 권력의 남용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이후에도 경제침체, 고립주의 강화, 대공황, 파시즘이 등장한 바가 있다. 위기와 공포에 대한 대응이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못할 경우의 혼란은 그 대가가 크다. 물론 100년 전과 비교해 시민 의식과 민주주의 수준은 큰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감염병 위기 상황에 대처하면서 행정권이 과도하게 강화된 것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테러와 같은 비상 상황과 함께 미래 예측되는 자연 재난이나 감염병과 관련한 법제도 정비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행정권의 남용과 견제 장치 그리고 국회나 다른 국가기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도 자문과 협의체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중앙과 지방, 그리고 행정부와 정당, 종교계, 전문가 집단, 시민 등이 참여하는 감염병 대응 거버넌스를 좀 더 체계적이고 민주적 운영을 위한 기제로 만들 필요가 있다. 지나친 행정권의 강화가 아닌 민주적인 통제가 가능한 결정력을 가진 거버넌스 체계가 필요하다. 초유의 감염병으로 인한 긴급상황에 초반에는 당황했지만, 이제는 이성을 가지고 코로나 19 장기화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정치와 거버넌스의 부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단기적으로 행정권에 일임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제 최소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국회, 정당, 지방의회 등 정치권만이라도 법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코로나19 거버넌스 체계는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인데, 구성 면면은 본부장 국무총리, 1, 2차장 보건복지부와 행정안전부, 그리고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질병관리청에서 담담하고 있다. 아직 중앙정부 차원의 대응체계이다.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전문가, 지방정부, 교육청 등 행정협의체 수준의 거버넌스를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된다면 행정부만의 힘으로는 버거울 수 있다. 행정부가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이 든다면, 시민사회, 학계, 경제계, 노동계, 종교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럴 때 정부통제가 아닌 자율적인 위기 대응 거버넌스 속에서 정치학자 로버트 달(Dahl)이 강조한 민주적 권위(democratic authority)가 강화될 수 있다.
공동체의 안전과 개인의 이익 조화
지구적 네트워크가 구축된 현대 사회에서 전쟁, 테러, 전염병으로부터의 위험은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 네트워크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성을 강화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런시먼(Runciman) 교수는 미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호를 3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쿠데타, 대재앙, 그리고 정보 권력이다. 2018년에 그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 내부의 쿠데타와 코로나 19와 같은 대재앙, 그리고 가짜뉴스로 야기된 정보 권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 진단했다. 그의 선지적인 통찰력은 2년 뒤인 2020년에 그대로 적중했다. 그는 현대 상호연결된 세계가 편리하지만 전 세계적인 감염병에 더 취약해졌고, 여기서 발생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21세기식 디스토피아가 나타날 것을 경고한 바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이러한 두려움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ICT 감시사회를 만들 것이라 경고했다.
앞서 제기한 코로나 19가 야기한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을 한국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 민주주의 수준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대응은 갑작스러워 우왕좌왕했지만 이제 장기전을 준비하려면 보다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을 고민해야 한다.
향후 코로나 19가 제기한 민주주의 위기는 단순히 일국 차원의 민주주의 가치의 논쟁을 벗어나 국제정치 차원에서도 새로운 정치환경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 가치 차원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지향점의 차이에 관한 고민이 요구된다. 공동체의 안전과 개인의 시민권을 조화롭게 운영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그동안 국가나 기업에 의해 지나치게 제공된 개인정보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보완할 제도적 입법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지 빅브라더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민권과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법제도 정비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법에 근거하여 코로나19와 같은 긴급 조치에서 의회의 논의를 거친 법 제도화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국가는 국가 질서와 공동체적인 가치를 우선에 두고 개인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제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학계, 정치권, 언론, 시민사회, 종교계는 테러, 감염병, 지진재난 등의 공동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한 시민교육의 중요성도 재확인해야 한다. 시민의식을 더는 개인의 소양이나 준비로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코로나 19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공적인 영역에서나 사적인 영역에서의 시민교육을 강화하여 전쟁, 자연재해, 테러, 지구적 감염병 등 위기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현명한 시민의식을 고양해야 할 것이다.
감염병은 일시적이지만 인류는 앞으로 이 지구상에 더 오래 존재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인류가 만든 가장 성공적 정체(polity)인 민주주의도 진화해야 한다. 변화발전 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코로나 19와 같은 새로운 상황, 변화된 시민의식에 따라 민주주의는 개선하고 진보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 19의 사례는 우리에게 분명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교집합을 만드는 것이 남아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공동체 보호에서의 균형이 필요하고, 시민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민권을 보장받는 정체이다. 미래의 민주주의는 정치과정에서의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법 제도적으로 시민의 자유로운 권리와 국가 공동체의 안전 사이의 공통분모를 넓히는 것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코로나 19의 위험을 기회로 활용하여 미래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이유이다.
송경재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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