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에 주는 프랑스혁명의 교훈…대한민국에 시민은 없는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주는 프랑스혁명의 교훈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원인은 재정위기…통화량 급증으로 인플레이션 65%에 달해

세금인상을 위한 삼부회 소집 이후 성난 파리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아이러니하게도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 설치로 처형당한 80%는 제3신분

이후 공포정치 속 사유재산 몰수, 무분별한 채권 발행 등으로 실업과 기근에 시달려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가 존중되고, 사유재산권 보장한 영국과 대조적

1789년 7월 14일 성난 파리 군중들이 당시 군사병원과 요새로 사용되던 파리 앵발리드를 습격해 약 3만 자루의 총과 대포를 빼앗고 탄약을 구하러 당시 왕실요새 겸 감옥으로 사용되던 바스티유를 습격해 주둔군 지휘관과 파리시장을 살해하고 그 목을 창 끝에 걸고 파리를 행진했다. 이것이 유명한 프랑스대혁명의 시발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애초부터 의도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봉건질서가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와 유럽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프랑스대혁명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 프랑스의 재정위기였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재정위기의 큰 원인이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전쟁(1775~83)을 지원한 것이었다고 경제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바로 얼마 전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전쟁을 벌인 결과 패하여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모두 잃은 바 있었던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요청에 흔쾌히 응했는데 이로 인해 재정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1788년 왕에게 제출된 재정보고서에 의하면 지출이 6억 2900만 리브르 (당시 프랑스 통화단위), 수입이 5억 300만 리브르로 적자가 1억 2600만 리브르로 적자가 지출의 20%에 달했다. 이로 인해 국채원리금 상환액이 3억 1800만 리브르로 지출액의 51%가 원리금상환에 사용되어야 할 정도였다. 주로 대지주들이 인수했던 국채의 원리금 지급을 중지해도 해결이 안되어 1억 리브르를 은행에서 빌려서 재정지출에 사용하다 보니 통화량은 급증해 마침 1788년 흉작과 겹쳐 65%에 이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했다.

할 수 없이 세금 인상을 위해 루이14세 이후 소집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성격을 지녔던 삼부회, 즉 1부 성직자 2부 귀족 3부 평민으로 구성된 삼부회를 175년 만에 소집했는데 원래는 세 신분이 동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평민대표를 두 배로 늘려 1200명 정도의 대표가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 모였다. 흉년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세금인상을 위한 삼부회가 순탄하게 진행될 리 없었다. 마침내 3부 평민들은 따로 국민의회 설립을 선언하고 헌법제정을 위한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자 성난 파리 군중들이 무기를 탈취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국민의회는 봉건특권폐지와 인권선언을 채택했다. 10월 5일에는 군중들이 베르사이유로 행진해 왕과 왕비 왕족들을 체포해 파리 궁전까지 19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6시간 동안 끌고 와 가두는 광란의 행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가 설치되어 5년간의 공포정치 동안 50만 여명이 투옥되고 4만 여 명이 사형당하고 그 중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넷트를 포함해 14000여 명이 그 악명 높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이러니칼한 점은 처형된 사람의 80%가 제3신분이었다고 한다. 공포정치를 이끈 사람은 악명 높은 자코뱅당 로베스피에르였다. 1789년 혁명 발발 당시 31세였던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역시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함으로써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 공포정치의 광란 속에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다. 재정 조달을 위해 몰수한 교회재산을 담보로 ‘아시냐’라는 채권을 발행했는데 마구 발행해 가격 폭락으로 사용을 중지하는 등 엄청난 실업과 기근으로 수많은 아사자들이 속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 혁명의 와중에도 1792년 오스트리아 벨기에 침공 1793년 영국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영토확장전쟁을 이어갔다. 이 전쟁에서 영웅이 된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전선은 이탈리아 이집트로 확대되다 마침내 1815년 영국과의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해 유배를 감으로써 광란의 영토확장 전쟁을 막을 내렸다.

한편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시작으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개인과 기업의 경제활동의 자유와 사유재산, 특히 특허권이 보장되자 경제가 활성화되고 증기기관 직조기 등 각종 새로운 기계발명 붐이 일면서 1760년부터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815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이겨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몰고 오면서 영국은 1850~73년 빅토리아 대호황기를 맞으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해 파운드화가 세계무역에서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팍스브리태니카 시대를 열었다. 반면 프랑스는 한 단계 낮은 선진국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231년 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오늘날 한국에 주는 교훈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재정위기를 방치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가장 가깝게 2011년 유럽재정위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유럽대륙의 봉건주의 붕괴를 초래하는 등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프랑스혁명도 그 발단이 재정위기였다는 점을 한국은 잊으면 안된다.

둘째는 프랑스혁명에도 불구하고 왜 프랑스가 다시 왕정복고로 돌아갔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의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명저 『프랑스혁명의 성찰』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전통과 문명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반면 프랑스혁명은 무지하고 오만한 폭력적 군중에 의해 전통과 문명을 파괴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폭력적 결과를 수반하게 되고 공익은 핑계가 되고 배신과 살인이 목적이 되어 약탈 복수 공포가 만족할 줄 모르고 지속되는가 하면 국정을 담당할 능력과 경륜을 갖추지 못한 무리들이 대거 국정을 담당하면서 사리사욕 채우기만 혈안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버크가 위 명저를 출간한 것은 혁명이 일어난 1년 후인데 정확히 그 후 일어날 공포정치를 예견하였다는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일부만 자유를 누리게 되고 대부분 억압적이고 굴욕적인 예속을 겪게 되어 반혁명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정치체제하에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할 수 있는 동기가 저하되어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 버크는 이 명저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가 존중되고 사유재산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개인과 기업의 경제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되어 경제가 활성화되고 마침내 선진국이 된다는 점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에 일어나서 1760년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을 촉발해 경제가 대호황을 이루면서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를 열었지만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제정과 공화정을 반복하면서 경제발전이 뒤쳐졌다.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사회주의사상이 확산되어 재정마저 악화되어 2011년 유럽재정위기 시에는 거의 재정위기 수준까지 가기도 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하겠다.

오정근 객원 칼럼니스트 (자유시장연구원장,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36233

 

대한민국에 시민은 없는가!

[민계식 칼럼] 미국이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 영국 정부의 중세(과도한 세금) 정책으로 시민들의 조세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영국 정부에서 식민지 시민들의 동요를 알아차리고 유화적으로 나왔더라면 미국은 (훨씬 후에는 몰라도) 상당 기간 더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중세 정책을 고집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 조지 3세는 영국 정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식민지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토머스 게이지 장군에게 시민들의 저항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밀명을 하달하였다. 게이지 장군은 식민지 지도자들이 은신해 있고 반란군의 무기가 숨겨진 곳을 공격 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여 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주 렉싱턴과 콩고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최초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이다.

영국의 정규군은 오합지졸인 식민지 민병대의 저항쯤이야 쉽게 진압되리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독립 의지가 투철한 식민지 민병대가 독립전쟁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식민지 시민들의 조세 저항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고 힘겨운 전쟁의 고통을 이겨낸 끝에 1776년 7월 4일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독립운동은 시민 스스로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은 독립을 쟁취한 원동력이었고 오늘날의 미국을 이룬 밑바탕이 되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구(舊) 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자 일어난 전형적인 시민운동이며 시민혁명이었다.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절대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적 정치 형태를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 시민계급의 정치 형태로 전환시켰으며 자유로운 근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6년 스위스 정부는 매달 19세 이상 성인에게 2,500프랑(약 300만 원), 18세 이하에게는 625프랑(약 75만 원)씩 지급하는 기본소득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스위스 국민은 압도적인 반대(77%)로 부결시켰다. 노조단체까지 반대하였다. 반대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땀 흘리지 않으면 스위스의 미래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위스 시민들의 모습이다.

홍콩은 아편전쟁 이후 약 100년 동안 영국령으로 있으면서 스스로를 중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홍콩인으로 규정하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확산되어 왔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일국이체제(一國二體制)의 협정을 맺으면서 중국에 반환되어 중국령 특별행정구가 되었으나 자치권과 자유에 대한 중국 정부의 침해가 심해지자 ‘우산 혁명’ 등 시민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최근의 ‘범죄자 인도 협정’ 문제에 대해서는 740만 인구 중 200만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중국 정부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며, 이 저항은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홍콩의 지역주의 흐름이 계속 확대되어 대만의 민족주의 수준에 도달하고, 나아가 더욱 강력한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될지는 장차 두고 볼 일이지만 이것이 홍콩 시민들의 모습이다.

지난 3년 반 동안 문재인 정권이 한 일을 한번 돌이켜보면 정치 보복,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 등에 따른 국가 경제 파탄, 민노총 행패,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내로남불(위선), 국민 편가르기(패거리 정치), 김정은 대변인 노릇, 비핵화 쇼, 수백조 원 규모의 뇌물형 세금 선심, 세금 퍼붓기 노인 알바 양산과 30~40대 일자리 격감, 국가부채 폭증, 각종 공공 기금 고갈, 공공 개혁 역주행, 희대의 파렴치 인물들의 법무장관 기용, 번번이 되풀이 되는 엉터리 불법 인사, 탄핵감인 선거 공작, 선거 공작 수사 검사들에 대한 인사 학살, 자기편 패거리의 비리 옹호,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한껏 왜곡한 선거법 강제 변경, 왕따 외교, 전통 우방들과의 선린 궤도 이탈, 굴욕적인 대중 속국 정책, 코로나 사태 초기의 방역 실패와 정치적 악용, 부정 선거, 집값 폭등, 세금폭탄 등 하나같이 악몽 일색이다.

도대체 문 정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한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는가! “이게 나라냐!”는 개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정권을 지지하면 나라가 어떤 꼴이 될는 지는 불문가지다.

대한민국에는 시민이 없는가!

출처 : 금융소비자뉴스(http://www.newsfc.co.kr)

https://www.newsf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