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February 17, 2020

사회주의, 공존 가능한가?… 종착역은 기독교 박해

사회주의, 공존 가능한가?종착역은 기독교 박해

1. KBS의 사회주의 공론화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KBS)는 2020년 1월 11일 밤 8시 사회주의가 반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요지의 방송을 한 시간 동안 내보냈다. ‘교회 정치, 광장에 갇히다’는 제목의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이었다.

광화문 이승만 광장에서 외치는 전광훈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대통령 문재인 하야 목소리를 기독교 보수층의 잘못된 이념에 기인한 극단적 활동으로 해석했다. 왜곡된 사상으로 무장한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KBS는 이 방송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반대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도했다. 좌파 성향을 가진 교회사 교수들과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을 동원하여 반공주의와 이승만 광장의 보수 기독교인 집회를 규탄했다.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역사적 유물론에 호의적인 뉘앙스를 보였다.

교묘한 편집으로 사실을 호도하기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박모 교수가 한때 기독교 진보계 인사들이 “한국교회는 반공을 회개해야 한다”고 한 말을, KBS는 마치 박 교수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이해되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KBS가 현 정부의 기호에 맞추어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사실이다.

사회주의에는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곧 혁명적 사회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부르주아 계급이 도구로 장악하고 있는 국가는 사멸해야 하고, 부르주아 계급 인사들이 노동자들을 통치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인 국가의 법도 사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2. 사회주의자 법무부 장관

대통령 문재인은 사회주의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사회갈등을 극대화했다. 조국 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사회주의자이다. 1990년대 성행하던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활동을 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그는 자신이 사노맹 활동을 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사회주의자라고 밝혔다. 사상적 전향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조국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는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이다. 조국이 공산주의자인 사실은 그의 사노맹 활동만이 아니라 그의 석사학위 논문과 법학지에 기고한 글에 분명히 나타난다.

조국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1989)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 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1917-1938’이다. 표절의혹에 휘말려 학교 당국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논문이다.

조국의 논지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법을 대한민국에 실현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 법을 만들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전시공산주의 단계, 신경제정책 단계, 대전환 개시, 사회주의 승리와 대숙청,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재전환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조국은 서론에서 자신의 사회주의 이해를 밝힌다. 형법에서 죄형법정주의, 재판청구 보장, 일사부재리 원칙, 소급입법 금지 원칙 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원칙들을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형법이론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주의 형태의 새로운 법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법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법이 가진 모순적인 형법의 대체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법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사회주의 법학을 도구로 삼아 우리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법을 사회주의 법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사회구조의 총체적 변화를 위해, 새로운 법학 방법론이 대두돼야 한다고 한다. 조국은 이처럼 대한민국 현실의 모순 해결을 소비에트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에서 찾는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눈을 우리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구조를 갖는 사회주의 사회의 법, 형법 현실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의 연구에서 밝혔듯이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는 차르 체제의 법, 사법기관을 철저히 폐지하고 그것과의 단절 위에서 새로운 법체제과 사법기관을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프롤레타리아의 진로를 막았던 것은 법에 대한 경제주의적, 허무주의적 태도 및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관념화였고, 이러한 편향과의 투쟁은 혁명초기의 프롤레타리아의 중요한 임무였다.

혁명 후 격동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숙청을 통하여 그 이전까지의 노력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나, 스탈린 비판 이후 다시 개화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원래의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진정 법과 합법성이 승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쇠퇴하고 있는가? 상술한 형법적 제 원칙은 진정 계속 발전되고 있는가, 아니면 많은 특별형법과 실무에서 퇴락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현재로서 우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조국은 1993년 법학지 <민주법학>에 기고한 논문에서도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개할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작업에 기초하고 또 이에 병행하여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은 한국 사회의 법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작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법 일반 이론에 대한 탐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체적 법 현실에 대한 천착이다. 구체로의 상승이 이루어질 때만 추상도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레닌의 말대로 ‘구체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혼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작업은 단지 법학자들 사이의 폐쇄적 이론적 담화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법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하는 올바른 계획과 방법을 잡아 나아가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법 이론은 그 본성상 현실의 진보 운동과의 교통이 필수적이며, 또한 진보 운동과 결합하여 그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조국, ‘현 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 <민주법학>, 제6호, 1993)”.

조국은 석사학위 논문(1989)과 <민주법학> 위 글(1993)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밝힌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서 추진한 검찰 개혁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나타난 형법 정신의 실현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법무부 장관으로, 민중민주주의 곧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실험정치를 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하여 자본주의 시대의 형법을 개혁하고자 했다.

다수의 우파 국민들은 청와대를 사회주의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국은 주사파 계열인 민족해방주의(NL: National Liberty)보다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는 민중민주주의(PD: People’s Democracy) 계열의 인물이다.

청와대는 공산주의자들 곧 주사파계 민족해방주의(NL)와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하는 민중민주주의(PD)의 힘겨루기가 한창인 듯하다.

사람의 사상은 변하기도 하지만, 조국은 변함이 없다. 초지일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지한다. 대한민국이 “마르크스주의 이름 하에 행해진 기왕의 이론과 실천을 면밀히 검토 비판해야 한다. 이 때 유의할 것은 이 작업이 단지 마르크스주의 청산과 해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민중적 입장에 선 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극복 전망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조국,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라고 한다. 이 주장은 석사학위 논문 논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대통령 문재인은 ‘빨갱이’인가?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몰상식한 판단, 성급한 추측이라고 비난한다. 당사자는 옳다 그르다고 답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을 추앙하고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문재인이 대한민국을 뒤집어 엎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고 단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국방력과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는 외교적 행보가 그 같은 판단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궤를 같이한다. 맥락에 따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두 체제는 사유 재산의 제거와 재화(財貨)의 집단 소유 제도를 지향하는 점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국가 또는 정부가 사유 재산과 집단화 프로그램을 통제한다. 경제적 재화와 소유물이 인민들 사이에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이상 사회를 지향한다. 지난 1세기 동안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나머지 국가의 부도와 하향 평준화 그리고 극빈국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함을 알려준다.

현대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구분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주체가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통제한다. 사회주의는 부의 편중을 막을 목적으로 생산 수단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소유한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에서 더 나아가 분배의 공평과 사유재산 부인, 공유재산제를 시행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많은 경우 같은 말이다.

4.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존 가능성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상극이다. 기독교가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재산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한다. 재산의 개인 소유에 관한 어떤 형태의 공유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제를 인간 삶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8)”.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는 개인이 정당하게 얻은 것은 즐길 권리가 있는 반면, 인색하거나 낭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본다. 땀 흘려 일하고, 얻은 재물을 근검절약하여 저축하면 자본이 생겨난다.

남는 자본을 재투자하여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생겨난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시장이 부강한 사회와 나라의 토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기독교 신도가 많아지면,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 박해에 전력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가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기독교가 개인의 재산과 자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윤리가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원시 공산제(共産制)는 개인이 모든 재산, 토지, 천연자원, 생산시설을 소유하도록 국법으로 인정하고 보호한다. 소유자의 자유로운 관리와 처분에 맡긴다.

계약 자유의 원칙과 더불어 발달한 사유재산 제도는 자본주의 문명의 원동력이다. 재산의 집중현상과 무산계급의 생존의 위협, 사회 이익이라는 이상에 어긋나자, 20세기에 이르러 국가는 생산수단, 천연자원의 개인 독점을 적당하게 제한하는 제도가 도입했다.

특수한 것만 국유 또는 국가관리 아래에 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소비재를 제외한 모든 재화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개인이 이윤을 얻도록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유경쟁을 보장한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한 자유, 평등, 사회정의를 실현을 추구한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 공공화, 중앙 집중적 계획 체제를 바탕 삼아 물건을 생산하도록 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실적-행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이상적 원칙을 실현하려고 한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것은 이러한 이상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다. 죄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없으면 생산 활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킬 만큼 생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셋째, 재화를 공동 재산으로 여겨 개인이 필요한 만큼 사용하게 한다지만, 인민은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개인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약점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생산과 소비 과정에 나타나는 환경파괴와 오염,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도 있다.

인간에게 준 재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재화를 위탁했다. 자기 것이라고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사치하거나 낭비함은 옳지 않다. 탐욕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최상의 가치와 덕목은 나눔이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등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은 나눔과 기부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 경제관은 기독교 경제관을 극단적으로 오해한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 방법으로 재산을 집단 체제가 소유한다. 전체 안에서 개인이 일부 사용권을 가질 수 있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공권력이 재산을 소유하므로 공적 집단을 장악한 권력자들, 권력집단이 국가 전체의 재산을 마음대로 가지는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들은 부패한 사회로 전락했고, 그 나라들은 극빈국이 되었다.

5. 기독교 진보계의 친공 정치활동

한국의 진보계 기독교는 줄기차게 반기독교적 행보를 걸어왔다.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와 맞닿아 있다. 민주화 운동과 연대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 낭만화에 적극적인 활동을 해 왔다.

왜 KBS는 한국의 진보계 기독교 세력의 음험한 사회주의 행보를 지적하지 않는가? 보수계 기독교인들이 교회 정치를 광장에서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줄기차게 펼쳐온 사회주의적 적화 정치 활동은 언급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보다 사회주의가 좀더 기독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치로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제도가 가진 모순을 타파하는 기능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빛 좋은 개살구(apricot)’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고치려다 국가를 부도내고 국민을 노예화 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모순을 빚어낸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통제·제한하고, 전제주의(totalitarianism)를 지향한다.

국가경쟁력 약화, 교육의 하향평준화, 거대 정부 형성, 국가의 지나친 간섭, 자유민주주의의 궤멸,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돌아가는 자유무역 기능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가져온다. 몰락한 동유럽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국은 어떤가?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1909-2001)는 루마니아 공산치하 감옥에서 8년 동안 잔혹한 고난을 받았다.

그가 저술한 <하나님의 지하운동>,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독방에서의 설교> 등은 사회주의 통치가 기독교를 얼마나 잔혹하게 박해하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변한다. 좌파와 우파가 대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다. 북녘의 사회주의 국가는 초지일관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핵무기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선의 통일을 훨씬 앞당겼다. 대한민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고종처럼 굴종항복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게 아닌가 싶다. 평양에서 자신을 ‘남녘 대통령’이라고 비하하여 칭한 문재인은 좌파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약 1천만 명의 기독인들의 목숨을 사경으로 내몰고 있다.

사회주의 논쟁은 70년 전에 있었던 해프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사회주의 낭만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왔다.

대통령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존경한다고 공언했다. 한미 동맹을 불안하게 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힌 자를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직에 임명했다.

평화는 힘으로 유지됨에도, 남북 평화가 대화로 유지된다는 궤변을 내뱉기도 했다. 가짜 평화를 진짜 평화로 오인하도록 사실을 호도해 왔다.

6. 사회주의를 버리라

대한민국 청와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폐기된 낡은 유물론적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은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험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억제해야 하고 박해해야 하고 뭉개버려야 할 대상이다. 영원한 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행하려고 하는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대두된 기독교 박멸 수단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생각은 비극에 이르는 첩경이다. 독일의 야당인 사회민주당(SPD: Social Democratic Party)의 당수이며 독일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슈뢰더(1944-)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사회주의를 버리라”고 말했다.

슈뢰더는 괴팅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68학생혁명에도 참여한 좌파성향의 정치가이다. 변호사로 일하다 사회민주당 당수로 1990년에 니더작센주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주지사를 세 번 연임했고, 환경정당인 녹색당과 연합하여 적록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슈뢰더는 강한 좌파 이미지 덕분에 1998년에 제7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로 선출되었고, 재임에도 성공했다. 프랑스와 연대하여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경제를 살릴 조세를 개혁하고, 기업 중심의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경제는 성장하지 못하고 실업률은 높았다.

슈뢰더는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왜 사회주의 정당을 이끌어 주지사와 총리를 두세 번씩 역임한 당수 슈뢰더가 사회주의를 버리라고 말할까? 사회주의를 대수롭게 않은 것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국민들, 기독교인들이 경청해야 할 의미심장한 조언이다.

기독인은 자기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심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이다. ‘빛 좋은 개살구’ 사회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낭만적으로 이해하다, 자멸하거나 노예 신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정치적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다.

아래의 BREADTV 동영상 ‘사회주의를 버리라: 정일권 박사와 최덕성 박사의 대담’은 위 질문에 답한다. 독일 총리 슈뢰더의 고언을 소개하면서, 사회주의를 비평적으로 논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아카데미의 선택 <기생충>,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아카데미의 선택 <기생충>,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느 영화제에 이어 미국 2020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과 각본상 등 4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와 관련, 지난해 영화 개봉 당시 기독교적 입장에서 <기생충>에 대해 분석한 글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진부한 계급 투쟁?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본지에 영화 분석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를 연재중인 박욱주 박사는 지난해 6월 영화 <기생충>에 대해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계급투쟁 프레임 안에서 해석한다”며 “한국적 입장에서는 사기를 획책하고 거짓말을 꾸미는데 능한 잔머리, 그리고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심한 질투심,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 이전투구가 일상화되는 저열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박 박사는 “영화에서는 계급에 따른 선악 구분이 모호한 편이다. 악하기로 따지자면 기득권층인 박 사장 가족보다, 서민이자 하층민인 기택 가족이 훨씬 악한 면모를 보인다”며 “물론 빈부격차를 고착화시키는 우리 사회가 서민들을 그토록 저열한 방식으로 살도록 몰아간다는 정치경제적 통찰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선악 구분의 모호함 때문에 계급 투쟁적 메시지보다 오히려 한국민 특유의 고질적 죄성이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영화 <기생충>에 묘사된 한국인들은 강렬한 질투심을 바탕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준칙도 법도도 없는 사기적 기질을 발휘하는 사람들”이라며 “가지지 못한 자들은 남이 노력해 획득한 것을 어떻게든 속여 갈취하기에 급급하고,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자신들처럼 되는 꼴을 보기가 싫어 어떻게든 구분선을 그으려 한다”고 분석했다.

박욱주 박사는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다소 자유롭다. 그들은 하향 평준화 대신 무한한 자기계발을 통한 경쟁에서의 승리를 열망한다”며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신의 경쟁자들이 무력하게 하향 평준화되어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를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구 사람들이 주로 ‘남 위에 서려는’ 정복욕을 끊임없이 긍정하며 투쟁하는 반면, 동아시아인들은 남을 끌어내려 ‘평균화하려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투쟁한다”며 “두 가지 모두 성경적으로 보면 죄된 육체의 정욕이건만, 전자는 진정 높은 곳을 바라보고 경주하는 투쟁을 부추기는 반면, 후자는 함께 낮은 수준에 머무르도록 억누르는 투쟁을 부추긴다”고 했다.

그는 “영화 <기생충>은 두 빈민층 가족의 혈투와 덩달아 봉변을 당하는 박 사장 가족의 태도를 통해, 왜곡된 집단주의를 기반으로 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의 참담한 정신상태를 가감없이 폭로하고 있다”며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마음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작품을 진부한 계급투쟁 서사로 바라본다면, 이런 반성 기회를 획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국인 특유 죄적 심성의 예리한 보고서

박욱주 박사는 이러한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집단적 평등주의’가 공산주의 사상과 결합됐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유독 집단주의·전체주의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 덕분에, 공산주의 통치 체제가 동아시아 지역에 상당히 오랜 기간 안착해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박 박사는 “계급 투쟁을 조장하는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의 질투심과 깊게 연관돼 있다. 애초 마르크스가 겪었던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현실은 경제적 정의가 한없이 결여된 시대였다”며 “공산주의 사상은 빼앗긴 노동자들의 권리, 즉 생산수단을 공평하게 소유할 권리의 회복이라는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를 이행하는 원동력으로 격정적 분노와 질투심을, 그 수단으로는 폭력 혁명을 권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는 기독교 정신과 정반대되는 면모”라며 “기독교의 복음은 사회적-경제적 불의의 상황이 닥칠 때, 내세에 대한 소망을 바탕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도우심이 임하기를 기도하도록 가르친다”고 비교했다.

또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혜택받는 이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투심을 갖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보다 못한 서민들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해 그들의 작고 정당한 권익들조차 빼앗으려 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생충 같다”며 “영화는 기태 가족의 사기와 범죄 행각을 통해, 한국 하층민들 사이 만연된 기생충스러운 행태를 비판적으로 폭로했다”고 했다.

이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질투심과 집단적 평등주의를 집중 조명하는 가운데, 한국인들의 선험적 죄성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도 반성할 거리를 제시한다”고 소개했다.

넘을 수 없는 선? 경멸과 혐오, 분열과 차별

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지혜 목사는 지난해 ‘모멸의 자격, 존엄의 자격’이라는 글에서 <기생충>에 대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며 “뛰어난 미장센은 물론 블랙코미디와 풍자, 스릴러 등 각 장르를 오가며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화두인 ‘양극화와 빈부 격차’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영화적으로 잘 다뤘다”고 호평했다.

김지혜 목사는 “자본주의 사회 계급 층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봉 감독은 전작 <설국열차>에서 열차라는 수평적 메타포를 통해 계급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표현하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기득권 계급의 특권을 무너뜨리는 투쟁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며 “반면 <기생충>은 계단이나 폭우 등 다양한 수직적 상징들을 네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두 가족의 상황에서 대조적으로 사용하면서, 계급의 차이와 갈등을 일상적인 차원에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박 사장(이선균)의 운전수였던 기택(송강호)은 박 사장이 그어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 고용주(雇用主)와 고용인(雇傭人) 관계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기택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선을 넘고 만다. 바로 박 사장이 근세(박명훈)의 몸을 대하면서 경멸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때”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택은 근세에게 자신을 이입하면서 이성의 끈을 놓고, 딸까지 잊어버린 채 박 사장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 분노로 변한 수치의 칼날을 휘두른다”며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에서, 모멸이란 의도적 혹은 무심코 다른 사람을 낮춰 보거나 하찮게 봄으로써 그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고 격하될 때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고 했다.

김지혜 목사는 “모든 것이 돈으로 수렴되는 사회에서는 사람의 가치 역시 돈으로 환산되곤 한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고 가치를 매긴다. 위계화시키고 존재마저 서열화한다”며 “누군가에게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만들고 누군가는 관계를 비인간화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마땅히 그 존엄을 존중 받아야 한다”고 의미를 짚었다.

그러면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던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죄인들의 편이 되셨는데, 그리스도인은 어떤 냄새가 나는 사람의 편에 설 것인가”라며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낸다는 것(고후 2:14-15)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지점”이라고 덧붙였다.

계급에 기생하는 계급주의 영화비판도

반면 영화를 매개로 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등을 저술한 본지 칼럼니스트 이영진 교수(호서대)는 영화 <기생충>에 대해 “계급에 기생하는 계급주의 영화”라고 평가했다.

이영진 교수는 “영화 <기생충>의 지배 윤리는 ‘선을 넘지 말라’는 금제에 대한 극혐이다. 즉 ‘선을 넘어라’인 것”이라며 “반일(反日)을 외치는 일제 포르노그라피 키즈, 계급에 기생하는 반(反) 계급주의자, 육사 콤플렉스, 제조업만 골라 패는 매국적 기업관, 이런 ‘기생충’들이 근절되어야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라고 했다.

이 교수는 “부자들은 높은 곳에 살기에 태양과 가깝고, 가난한 자들은 낮은 곳에 살기에 습윤과 거기에 기생하는 벌레들에 더 노출돼 있다. 소독차 가스는 마치 그들이 벌레와 동급이 된 듯 보이게 하려는 매개일 것”이라며 “그러나 실제로 반지하에 살고 있는 관객들에겐 어떨까. 영화가 이해해 주니 감사할까? 정작 그들에게는 어떠한 공감도 희망도 제시 못하는 영화”라고 비판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물질이 모든 착함의 근원이다. 물질이 있어야 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험적 진리이지만, 유물론적 진리”라며 “그래서 반지하방에 사는 사람들을 소재로 착해질 수 있는 돈을 벌었지만, 저 모든 반지하방의 사람들을 꺼내주진 않는다. 유물론 자체가 상부구조를 무너뜨려 하부구조를 착취하는 기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생충>의 물질관”이라고 전했다.

또 “가난한 주인공들은 이 부자 가정에 큰 감정이 없고, 오히려 감사해한다. 하지만 결국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며 “그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계급을 가져오는 사회구조를 미워하라는 암시인 것 같다”고도 했다.

복음주의 크리스천 목사가 본 영화 <기생충>

최근 한국계 줄리어스 김 대표가 취임한 미국 복음연합(TGC)에서,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에 대해 소개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전인 지난 1월 말 게재된 이 리뷰는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 ‘True North Church’ 한국계 유진 박(Eugene Park) 목사가 작성했다. 미국 복음주의 크리스천 입장에서 본 영화 <기생충>에 대해 번역 소개한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우리 각자의 기생충’ The ‘Parasite’ in Each of Us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유머와 서스펜스, 미스터리, 공포를 완벽하게 혼합 한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선사해 준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은 그의 최고 작품이다.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은 한국 작품으로서 최초이자 최고의 기록이다.

(거기에 작품상과 감독상, 국제극영화상과 각본상까지 주요 4개 부문에서 수상의 쾌거를 이뤘다. -편집자 주) 그리고 미국에서의 기록적인 관객 행진, 그리고 이미 많은 상들을 받음으로써 세계적인 문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 <기생충>은 어떤 점에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을까? 아마도 칙칙하고 불안정한 인간 본성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생충(parasite)’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줄거리를 완벽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빌붙는 거머리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 이물질이나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도 살아 존재함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하다.

욕망의 기생충 Parasite of Desire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 긴장을 탐구해 왔다. <옥자>나 <설국열차> 등의 작품들에서는 특정 지역이 아닌 공상 과학 또는 환상적인 곳이 배경이었지만, 이번 영화 <기생충>은 대한민국이라는 지역의 서울 속 대조되는 두 환경에서 살아가는 두 가족(각 구성원 4명)에 중점을 둔 드라마이다. 빈곤층 김씨 가족은 부유층인 박씨의 집에 서서히 침투한다. 영화는 유머러스한 혼돈을 거쳐, 결국에는 재앙의 바닥에 다다른다.

김씨 집안의 ‘기생충’스러운 방식과 끔찍한 가난은 영화의 오프닝 장면부터 부각된다. 그들 4인 가족은 우중충한 반지하 건물에 살고 있고, 환기가 되지 않는 집은 소독 트럭이 지나가면 자욱한 연기로 가득찬다.

김기택(송강호)의 장남 기우(최우식)는 가족의 운명을 바꿀 ‘수석(壽石)’을 선물한다. 이 ‘돌멩이’는 가족이 오랫동안 원했던 행복과 재산, 부(富)를 가져다줄 것 같았다. 그러나 하이라이트 신(scene)에서 그 ‘수석’은 물에 잠긴 집에 동동 떠오른다. 모두 가짜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 모습은 아버지 기택을 비롯한 가족의 정교한 사기와 일치한다. 그 사기란, 그들의 신분과 재산 상승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계략이었다.

결국 홍수로 집을 잃어버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기우는 수석을 움켜 쥔 채 말한다. “이것(수석)은 계속 내게 달라 붙어있다.” 이 돌은 우리 영혼에 기생하는 욕망을 상징한다.

영화는 우리의 욕망이 막 실현되기 시작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 욕망이 성취되고 채워진다 해도 우리 영혼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

그 욕망은 우리 영혼에 빌붙어, 우리를 말아 비틀어지게 할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피바다에 기우를 때려 눕히는 것이 그 ‘수석’이라는 점은 매우 적절했다. 잠언 27장 20절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는가.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비교라는 광기 Madness of Comparison

기생충적 욕구는 주로 비교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봉 감독은 김기택과 박 사장 집안을 생생하게 대조시켜 이를 명백하게 묘사해 준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수 부문 후보작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영화 속 두 집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다.

김기택의 집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계속해서 아래로 움직여간다. 그들의 반지하 집에서 도로는 항상 자신들의 위에 보인다. 그들의 경제적인 사정도 그렇게 고정돼 있다.

반대로 박 사장(이선균)의 저택은 말 그대로 웅장함을 자랑하는 ‘언덕 위의 집’이다. 박 사장의 집에 들어가려면, 마치 날아 올라가듯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들의 집에서는 김기택이 사는 우중충하고 불결한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푸른 초원이 거대한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데, 가족들은 그곳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

김씨 가족의 탐욕은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SNS)가 보여주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매일 일종의 ‘충격’을 받고 있을 것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기우와 기정 남매가 (반지하라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 안테나를 필사적으로 찾는 모습은 그래서 더더욱 적절했다. 그들은 오늘의 우리처럼, ‘디지털 경험’에 중독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은 결국 ‘욕망하는 기생충’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로 계속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의 생각을 크게 비튼다. 봉 감독은 우리를 비교의 광기와 파괴와 직면하게 했다. ’누구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비교 게임은 쓸데없다. 무의미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계급 상승이 다른 이들의 내어쫓김을 의미한다면, 오르막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끝으로, 영화에서는 부자와 빈자 중 누가 더 행복한지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결국 ‘우리와 그들’ 사이의 뚜렷한 대조는 ‘만들어진 차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외적으로 보이는 가식적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 다르다기보다는 비슷하다.

타락의 평등 Equality of Depravity

영화 <기생충>은 주인공과 악당(?)을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마치 기생충처럼 머무른다. R등급을 받은 이 영화는 모든 인간, 심지어 ‘영웅’조차 악과 그리 멀지 않다는 가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사실 성경 전체에 걸쳐 이러한 진실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Mike Cosp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죄인 또는 성도임을 이해하는 것이, 그 둘의 혼합임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쉽다.”

기택의 가족은 ‘사다리 꼭대기’가 더 명예롭고 도덕적인 삶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기우의 어머니 충숙(장혜진)은 박 사장 가족에게 “(부자인데도 착한 것이 아니라,) 부자라서 착한 것”이라고 말한다. (돈이 주름살을 쫙쫙 펴준다며)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쯤, 두 가족 모두 그들이 추구하는 명예를 얻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위층과 아래층의 상태를 모티브로 하는 영화에서 말 그대로)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더 많은, 더 나은 또는 다른 것을 원하는 ‘욕망의 기생충’이 여전히 숨어 있다. 업적과 지위는 죄의 본성의 중심 문제, 즉 기생충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된다.

영화 <기생충>이 말해주듯, 타락은 보편적이다(Depravity is universal). 암울한 메시지이지만, 이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희망을 설정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모든 가로대가 사다리에 걸쳐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주어져 있다. 세상적 지위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똑같이 ‘죄인’이다.

부유함이나 좋은 집, 고용인들을 통해,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숨길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의 사다리가 아무리 낮은 곳에 있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