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북한인권인가?
태영호 전 북한 공사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사태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불법여부는 잘 모르겠고 한국사회 구조의 허점을 몰라 그것을 조국처럼 활용하지 못한 (자신 같은) 국민들만 바보가 됐다”는 것이다. 태 공사의 지적에서 조국 류(類)의 옛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사고방식이 이해됐다. 대한민국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이니 그 시스템에서 혁명가들이 잠시 사익을 획득하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도덕적으로 무관하며 어차피 민중이란 그들에게 주인이 아니라 낭만적 혁명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지배받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대접받기 원했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고대 군주들도 백성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약속했고 그 약속이 깨질 때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저항해 왔다는 것이다. 20세기 ‘구질서는 무너지고 새질서는 보이지 않는’ 불안한 유럽의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평등을 위해 기꺼이 나치에 자유를 반납했다는 것이 드러커의 결론이었다.
21세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은 평등을 구실로 자유가 반납된 사회다. 역사는 자유를 버리고 평등을 추구한 체제는 자유도 평등도 모두 잃는 상황에 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배 권력이 폭력과 강압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기이한 현상 중 하나는 평등과 인권, 민주화를 그토록 강조해온 우리사회내 이른바 진보세력이 북한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 있는 사실이다. 수백만이 굶어죽고 수십만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으며 매해 유엔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되고 미국과 일본 의회에서 북한인권법이 실행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3년전 뒤늦게 가까스로 통과된 북한인권법 마저 사문화 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기적 같은 현상이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자신들의 실패원인을 외부의 적 때문으로 돌려왔다. 그들을 말살하려는 미국을 내치고 남한을 압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기에 핵을 포기하면 북한체제는 안보적으로나 논리적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북한 비핵화가 협상으로 타결될 일은 애당초 만무했던 것이다.
북한인권은 비핵화 한반도의 판세를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북한인권은 북핵문제 해결의 전제이자 결과이다. 북한을 변화시키는 카드는 역설적으로 북한체제가 갖는 정당성의 이유, ‘모든 인민이 복되고 평등한 체제’의 이행을 도와주는 것 곧 인류보편의 가치인 인권을 회복하는 것이 된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보편율에 북한 주민들과 북한 엘리트들이 눈을 뜨면 북한의 우상숭배 독재체제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인권 문제에 닫혔던 우리의 눈과 귀가 열리는 날 북한과 한반도에는 진정한 변화와 자유통일의 문이 열리고 우리사회내 전체주의 혁명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417
북한인권과 짖을 줄 모르는 개
주전 8세기경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망했고 남왕국 유다에서 메시야 예언을 하던 선지자 이사야가 안식일을 범하고 우상숭배가 만연되며, 지도자들의 부정의가 확산되고 있을 때 “백성들을 지켜야 할 파수꾼들은 눈이 멀었고 그들 모두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두가 짖을 줄 모르는 개 같아서 누워서 잠자는 것이나 좋아하면서 굶주린 개 같이 만족할 줄을 모르고 목자면서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제길로만 가고 자기 이익만 찾으려 한다”(사56:10, 11)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필자는 주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에서 풀려난 동물을 의인화 하여 짧은 이야기를 만든 풍자적인 우화(寓話)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솝의 우화 한토막이 생각났다. 어느 날 닭과 개가 서로 자기들의 정당성과 상대방의 직무유기를 ‘달님’에게 고발했다.
그 개가 저 닭은 해가 떴는데도 주인을 깨우려고 울지를 않아 자기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자, 닭의 대답은 “주인은 ‘시계’를 갖고 자명종이 울고 있어 내가 우는 소리 이전에 깰 수 있다 생각하여 나는 울지 않았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닭이 개를 고발하여 “저 개는 도적이 들어오면 짖어야 하는데 요즈음 짖지를 않는다”고 하자, “그것은 내 주인이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도둑인데 내가 어찌 짖으리요”하면서 변명했다는 우스꽝스런 우화가 있다.
9월 4일은 우리나라가 북한인권법을 제정한 지 3주년이 되는 때다. 그러나 북한인권재단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예산이 거의 삭감돼 유명무실한 상황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9년 탈북자들이 그 땅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떠돌이를 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탈북난민보호운동’(CNKR)을 펴서 전 세계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호소하여 1180만 명의 서명을 받아 2000년 탈북자들은 국경침법자가 아닌 난민으로 인정 받았다.
유엔에서 북한인권법을 통과하고 미국의 상하양원,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방세계는 물론 전 세계가 이 일에 동참한 후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북한인권법이라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아직도 북한의 눈치를 보는 현실 속에서 북한인권 회복을 위해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정은 독재정권과 북한의 주민을 분리해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찾아 줘야 한다는 것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 이슈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바르게만 활용하면 정부는 국민적 지지를 받을 뿐 아니라 북한의 핵을 대응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인권기록보전소에는 검사가 상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북한인권법은 사(死)문화 되다시피 되었다 한다.
오늘날도 ‘보지 못하는 인도자’요 ‘안일주의에 빠진 벙어리 개’와 ‘탐욕스런 쾌락주의자’가 잘못된 부패한 지도자 상이다. 우리 주님이 오셨을 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이것이 복음이다. 복음화 된 통일조국건설을 위해 이 복음을 북녘 땅에도 전파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이 회복되어 세계 복음화의 교두보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