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무역전쟁에 이어 환율전쟁 ‘포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무역전쟁에 이어 환율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미 상무부가 달러에 대한 자국 통화가치를 절하하는 국가들에 ‘상계관세’를 부과하는 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23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새로운 규정의 추진은 미국 상무부가 미국 산업에 피해를 줄 수 있는 ‘통화 보조금’(currency subsidies)을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을 해외 수출국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들은 더는 미국 노동자들과 기업들에 불이익을 주는데 통화정책을 활용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이같은 조치는 불공정한 통화 관행을 다루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을 지키기 위한 한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상계관세는 수입하는 제품이 수출국의 보조금 지원을 받아 경쟁력이 높아진 가격으로 수입국 시장에서 불공정하게 경쟁하고 산업에 피해를 줬다고 판단할 때 수입국이 부과한다. 미 상무부는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와 함께 수입 제품들에 대한 수출국 보조금 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조사한 뒤 판정해 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그러나 통화절하를 판명하는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미 정부가 중국산 수입품 추가 관세 인상에 이어 새롭게 중국에 타격을 주려 한다고 풀이했다. 앞서 미국은 지난해 멕시코, 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는 새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서 경쟁적인 통화 평가절하와 환율조작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환율은 미중 무역협상에서도 주요 의제에 올라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의 위안화 가치 하락을 문제 삼아 중국이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달 초 미중 무역협상이 암초에 부딪친 가운데 두 나라의 관세 추가 인상과 미국의 화웨이(華爲) 테크놀로지 등 중국 통신장비업체에 대한 제재 등으로 다시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위안화는 요동치고 있다. 달러·위안화 환율은 한 달 새 3%나 급등(위안화 가치 급락)해 현재 6.9위안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7위안 돌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위안화 환율이 ‘포치‘(破七·달러당 위안화가 7위안대 진입)가 되면 미국은 환율에 대해서도 제재를 대폭 가할 공산이 크다. 이를 간파한 중국 금융당국은 포치가 이뤄지지 않도록 시장개입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위안화 가치가 추가 하락하면 중국은 자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대거 매도해 환율 방어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글로벌 외환시장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환율 힘겨루기에 경제 펜더먼탈이 취약한 신흥국을 중심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미 상무부가 상계관세를 부과하면 중국과 더불어 재무부의 환율관찰대상국에 올라와 있는 한국과 일본, 인도. 독일, 스위스도 관세 인상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미 재무부는 해마다 4월, 10월 두 번에 걸쳐 환율보고서를 발표한다. 올해는 보고서 발표가 미뤄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앞서 이달 초 한국과 인도가 올해 보고서에서는 관찰대상국에서 제외되고 대신 베트남이 들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날 부총리 등 베트남 고위 관리들과 회동했다. 블룸버그는 환율보고서 발표가 임박한 가운데 미국이 베트남 측 입장을 좀 더 들어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려 한다고 설명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美, 관세·화웨이 이어 ‘새로운 칼‘.. 中선 ‘시터후이‘ 회의론
美, 中에 ‘환율전쟁’ 카드 꺼내 / 美, 무역 흑자국에 상계관세 폭탄/ 트럼프 “中 환율조작해 수출 늘려”/ 美, AI·로봇공학 등으로 확전 준비/ 드론 제조업체 다장 등도 ‘정조준’ / 시진핑 “단합해 강대한 역량 만들자” / 中 관영매체도 연일 美 향해 날 세워 / 6월 G20 계기 ‘무역담판’ 어려워져 /美·中 출혈 커 타결 가능성도 상존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양국 간 전면적 ‘경제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관세와 기술에 이어 23일(현지시간) ‘환율카드’를 새롭게 빼 들면서 전선이 무한 확대되고 있다. 환율 문제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 그리고 한국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장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안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 내에서는 다음달 28,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시터후이’(習特會·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회담) 가능성에 대해 회의론이 불거지고 있다.
◆美, 中 겨냥 환율전쟁 포문
미국 정부가 무역이익을 위해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를 판정해 이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는 국가들에 대해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이 향후 무역상황에 따라 대미 무역 흑자국에 ‘관세 폭탄’을 안길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무역에 또 하나의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번 미 정부 발표는 우선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환율 문제는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의 하나로 지목했었고, 미·중 무역협상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중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해 자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여 왔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은 아울러 중국을 겨냥해 핵심부품 공급을 차단하는 제재 범위를 대폭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미 정부는 상무부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외국 기업들의 이름을 올리는 블랙리스트(Entity List)를 개정해 몇 주 내에 구체화하기로 했다. 새롭게 개정되는 블랙리스트에는 인공지능(AI), 로봇공학, 3D 프린팅 등 미래 최첨단 기술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미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華爲)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드론 제조업체인 다장(DJI), ‘하이크비전’ 등 5개 영상장비 감시업체를 정조준했다.
◆‘대장정’ 상기하며 단합 강조한 習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4일 싱크탱크인 중국 국제경제교류중심의 장옌성(張燕生) 수석연구원의 견해를 인용해 “현재 상황이 맞지 않아 미·중 정상회담 성사가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장 연구원은 전날 중국 정부가 주관한 브리핑에 참석해서도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G20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만나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라며 회의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우리 동양인들은 체면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미국은 철저히 이를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원은 무역협상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기관 연구원의 이 같은 분석은 중국이 미·중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SCMP는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G20 정상회의 당시 중국이 양국 정상 간 회동 추진에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다.
루캉(陸慷)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브리핑에서 “중국은 우호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경제무역 분야를 포함한 이견을 해결하기를 원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면서도 “다만, 대화와 협상은 상호 존중과 평등의 기초 위에서 이뤄져야만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 관영매체가 연일 대미 비판에 나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관영 신화통신,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 중국 중앙방송(CCTV) 등 중국 3대 매체는 지난 10일(현지시간) 워싱턴 무역협상이 결렬된 뒤 줄곧 미국에 날을 세워 왔다. 이날 인민일보는 1면에 또다시 칼럼을 게재하고 “우리는 오늘 새로운 대장정 위에 서 있다”며 “국내외 각종 중대한 위험과 도전에 맞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 주석도 이날 95세 퇴역군인 장푸칭의 업적을 강조하며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단합해 새 시대의 강대한 역량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무역전쟁을 맞아 국공내전 당시 대장정 때처럼 다시 단결하자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양국 정상 간 회동과 무역협상 극적 타결에 대한 기대감이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역전쟁 장기화로 양측 모두 출혈이 커지고 있어서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무역전쟁에 따른 미 농가 지원계획을 발표하며 “화웨이 문제를 무역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무역협상 타결을 고리로 화웨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루캉 대변인은 이에 대해 “미국 측이 어떤 의미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서도 “미국은 국가 역량을 동원해 다른 국가의 기업을 압박하는 행위를 중단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이우승 특파원 wslee@segye.com
‘환율로 무역흑자‘ 막겠다는 美.. 中겨냥 그물에 한국 걸릴 우려
미국이 23일(현지 시간) 자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내리는 국가들에 상계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것은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의 대비책을 원천 봉쇄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실제 미국이 높은 관세를 매겨도 중국이 통화 가치를 크게 내리면 중국의 대미(對美) 수출품은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이는 한국의 원화 가치도 하락하는 상황에서 나온 조치여서 한국의 외환당국으로선 인위적 시장 개입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정상적인 시장 개입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통화 가치 내리는 건 정부가 보조금 주는 것’
이날 미 상무부의 발표는 미국이 중국 제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는 데다 미국 기업들의 중국 화웨이 제품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압박이 이뤄지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미국은 인위적인 통화 가치 절하가 정부 보조금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다. 한 나라가 환율을 조작해 부당하게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이를 보조금 지급 행위로 간주해 해당 국가의 상품에 보복적인 상계관세, 즉 정부 보조금으로 간주되는 금액을 상쇄할 만한 세금 폭탄을 매기겠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이 중국에 높은 관세를 매겨도 중국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이번 상무부의 조치는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가동할 수 있는 국내 규제를 총망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환율 변동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일일이 가려내기 어렵다. ‘환율 조작’에 따른 통화 가치 하락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중국은 고정환율제를 택하되 시장 상황에 따라 미세하게 환율을 조정하는 ‘크롤링제’를 채택하고 있다. 위안화 가치는 이달 초 미중 무역 협상이 결렬되고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이 더해진 후 급격히 하락했다. 위안화 가치는 달러당 6.9위안대에 들어서며 지난해 11월 30일 이후 최고치였다. 정부의 인위적 개입에 따른 환율 인상 폭을 가려내는 것이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미 상무부가 수 주 내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외국 기업의 수출품을 ‘수출제한 목록’에 올려 기술 이전 및 핵심부품 공급을 제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 정부는 첨단 기술을 다루는 기업 및 직종에서 외국인 기술자의 고용을 제한하는 내용도 논의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 한국도 ‘원화 가치 높여라’ 압력 받을 수도
미국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도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이 직접적인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을 낮게 보지만 중·장기적으로 외환당국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
이번 상무부의 조치로 환율조작국이 아니라도 통화 가치 하락만으로 추가 관세를 부과받을 위험이 생겼다. 한국은 미중 무역분쟁의 여파로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무역분쟁으로 글로벌 투자심리가 하락하면서 돈이 안전 자산인 달러로 몰리면서 상대적 위험 자산인 원화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이런 원화 가치 하락은 한국의 수출가격 경쟁력을 높여 대미 무역수지 흑자 폭을 넓히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대미 흑자가 더 늘면 미국은 한국에 원화 가치 절상 압력을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 워싱턴=이정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