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관순 가문은 신앙·저항정신의 뿌리였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은 유씨 가문의 기독교 신앙과 삶 속에서 경험한 항일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반도 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 최태육(사진) 목사는 유관순 일가의 삶을 해당 지역의 역사와 교회 및 선교 역사 등에 비춰 재조명한 ‘유관순 가(家)의 사람들’(신앙과지성사)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최 목사는 ‘진천감리교회 90년사’를 쓰기 위해 2006년부터 충북 진천과 충남 천안 일대를 답사하며 지역의 기독교 및 선교 역사를 연구했다. 이후 10여년간 50여 차례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천안 병천면 용두리 지령 마을과 유관순의 6촌 할아버지 유빈기와 유중무가 세운 지령리교회의 흔적을 발견했다.
최 목사는 26일 “지령리교회가 있던 당시 목천군에선 정미의병과 일본 토벌대의 전투, 일본의 ‘직산 금광’ 침략 등 일제의 수탈이 구체적으로 자행됐다”며 “특히 일제의 만행 앞에 무기력한 관청 관리들의 모습에 실망한 주민의 상당수가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1907년 10월 일본군이 이곳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는 보도가 있었다”면서 “지금은 사라진 지령리교회 서까래에서 불에 탄 흔적을 봤다는 지역 어른들의 증언에 비춰 보면 지령리교회의 저항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07년 8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의연금 수입광고’에서도 유중무 등 ‘지령야소교당’ 교인 82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최 목사는 특히 1908년 1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케이블이 주도한 부흥사경회에 주목했다. 당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눈물로 회개하며 생활을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자기 갱신 운동이 일어났다. 최 목사는 “어린 유관순도 그 자리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인 유관순의 할아버지 유윤기는 종과 머슴을 풀어주며 봉건계급 철폐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이렇게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복음이 1919년 4월 유관순과 집안 사람들이 병천 아우내와 공주읍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매우 컸다.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가 현장에서 숨졌고 아버지 유중권도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졌다 이튿날 숨졌다. 숙부 유중무와 유관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투옥됐다. 유관순의 사촌 언니 유예도를 도피시킨 사촌 오빠 유경석과 올케 노마리아는 일제로부터 갖은 괴롭힘을 당했다. 그럼에도 유관순 가문은 끝까지 신앙과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최 목사는 그해 6월 16일 집안의 기둥이던 어른 유윤기가 사망한 뒤 7월 9일 충청남도 장관 구와하라 아츠시가 조선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사미 가스오에게 보낸 보고서를 찾아냈다. 최 목사는 “보고서를 보면 기독교 때문에 일가가 멸족됐으니 유윤기를 전통방식으로 장례 치르자는 집안 사람들에 맞서 유관순 집안의 사람들은 기독교식 장례를 고수했다”며 “이들은 민족의 독립과 기독교인의 각성을 통한 복음화가 꼭 이뤄진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유중무와 그의 아들 유제경,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그의 아내 조화벽에 이르기까지 유관순 가문의 사람들은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일제에 저항하며 살았다. 최 목사는 “유관순 가문의 정신과 삶은 진정한 헌신과 희생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며 “이들이 보여준, 민족과 기독교 신앙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64299&code=23111111&sid1=chr
“민족·국가의식, 3·1운동 이후 한 차원 높아졌다”
3·1운동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에게 나와 가족, 주변을 넘어 민족과 국가 의식이 생깁니다. 민족과 국가의 존립이 생존권의 절대조건이란 걸 깨달은 것이지요.” 1919년 3·1운동 이듬해 태어나 올해 상수(上壽·100세)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전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다.
한국근현대사의 산증인인 김 교수는 25일 서울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3·1운동과 통일 포럼’에서 “100년간 3·1운동만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포럼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시대정신을 재조명하고 한반도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자 국민일보와 통일한국세움재단(이사장 신대용)이 공동으로 마련했다. 김 교수는 이날 ‘3·1정신의 현재적 의미와 우리의 과제’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인 그는 일본 조치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양성해 왔다.
이날 김 교수는 원고 없이 주요 내용을 적은 쪽지만으로 강연을 소화했다. 시종일관 정정한 자세와 또렷한 목소리로 연설해 강연 직후 참석자 400여명의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강연에서 “그간 우리 민족의 생활 단위가 나와 가족 직장 등 주변에 국한돼 있었으나 3·1운동 이후엔 민족과 국가로 한 차원 높아졌다”고 밝혔다. 세계 여러 민족의 역사를 보면 국가는 가족에서 사회공동체로, 사회공동체에서 국가공동체로 변모하는 일종의 계몽 과정을 거친다. 우리의 경우 3·1운동을 통해 국가공동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3·1운동 이후 국민이 나라 발전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의식구조가 변화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6·25전쟁, 4·19혁명, 문민정부 출범 등 직접 마주한 역사의 순간들을 열거하며 사회 변화상을 조명했다. 전쟁 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했고 4·19혁명 등으로 민주주의 암흑기를 겪었다. 박정희정권 때에서야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데 이어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김 교수는 “김영삼정부가 돼서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법이 지배하는 법치국가가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선진국가로 나아갈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선진국가는 법이 아니라 질서가 지배하는 ‘질서사회’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질서사회’는 윤리 도덕 종교 등의 선한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통일한국을 위한 조언도 했다.
그는 “통일 이후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정권욕에 빠져 애국심을 상실하는 지도자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20세기의 잔재인 이념 대립도 끝내야 한다. 선진국들은 보수와 진보의 상생을 넘어 다원적 가치를 담아내는 열린 사회를 추구한다”며 “진보와 보수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폐쇄사회로 간다면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은 100세 철학자의 마지막 바람은 조국이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한국 규모로는 100년이나 200년 후에도 정치나 군사 대국이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문화 대국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만일 100년 더 살 수 있다면 우리 문화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논찬을 맡은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지성의 선구자이자 깊은 영성을 지닌 김형석 교수님의 통찰에 공감한다”며 “우리 목회자들부터 목회 영역을 민족·국가적으로 확대해 한국교회가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64028&code=23111111&sid1=chr